“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자신의 일기에 적어놓은 글처럼 전태일은 가엾은 소녀소년 노동자들을 위하여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안은 채 온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죽어가면서 그는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당부했다.
전태일의 분신 후 그의 집을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이 함석헌이라고 한다. 함석헌에게 전태일의 분신은 한 노동청년의 외침이 아니라 하늘의 소리였다. 그 소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소리였다. 그 소리는 씨알의 함성이었고,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너희가 인간으로서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하나님의 질책이었던 것이다. 그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희생은 노동현실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노동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인권변호사 조영래는 “우리는 전태일에게서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진보적이 된다’는 명제를 배우게 된다”고 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안에서 작업하다 사고를 당한 19세 청년 김군의 죽음이 헛된 것인지 아닌지는 지금부터 결정돼갈 것이다. 비록 박봉에 컵라면 한 그릇 불려먹을 여유조차 없이 밀려드는 업무를 감당치 못하고 무리를 하다가 어이없이 당한 사고였지만, 비록 원청 하청 재하청의 모순적 경제구조 하부에 깔려 온몸으로 지탱하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당한 희생이지만, 비록 메피아니 비정규직이니 외주화니 하는 이상하고 불의한 경제현상들이 만들어놓은 죽음의 덫에 필연적으로 걸려든 것이지만, 아직 ‘헛된 죽음’이라 말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죽음의 가치와 의미는 결국 남겨진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가 부주의하여 그렇게 된 것처럼 모든 죄를 덮어쓰고 소리 없이 묻혀버리면 정말 헛된 죽음이 되겠지만 사실이 무엇인지 밝혀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어 과감하게 수술을 하여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어이없는 죽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낼 수만 있다면 지나친 대가를 지불했다고는 해도 아주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해 일어난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면 이번 구의역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엊그제 서울시장은 기자들 앞에 나와 고인과 유가족, 그리고 서울시민 앞에 사죄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고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약속에는 책임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불공정한 하청 구조 청산, 메피아 척결, 차별적 보수체계 재설계, 개혁에 대한 명문화된 조례 제정, 안전 시스템의 획기적 혁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로만 끝나지 않는지 불꽃같은 눈초리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김군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4·16연대 회원들이 40만여명의 서명을 받아 20대 국회 세월호 특별법 개정을 입법청원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미 특별법 개정안 3건이 발의됐고 서명한 의원들을 모두 합치면 과반인 153명이 된다고 하니 여기서 멈추지는 않을 것 같다. 1993년 서해 페리호 참사 때 290여명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면, 2014년 즐거운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세월호에 승선한 아이들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유장춘(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바이블시론-유장춘] 그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입력 2016-06-09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