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푼 꿈을 안고 도전장을 내밀었던 메이저리그. 그 뒤에는 꼭 살아남아야만 하는 생존 경쟁이 뒤따랐다. 극도의 긴장감이 밀려왔다. 한국에서 유명했던 ‘타격 기계’란 별명은 오히려 부담이 될 뿐이었다.
볼티모어에서의 5개월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시즌이 개막하기도 전에 마이너리그에 내려갈 뻔 했다. 강등 거부권을 써가며 꿋꿋하게 25인 로스터 안에서 버텼다. 홈팬들은 시범경기 부진을 이유로 홈 개막전에서 그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팀의 신뢰도 제대로 얻지 못했다. 타석에 들어설 기회가 적다보니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실전 감각을 끌어올린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김현수(28·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이야기다.
이처럼 부진 속에 치를 떨고 있었을 때도 그에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컨택트’ 능력이 있었다. 벅 쇼월터 감독의 부름으로 가끔 타석에 들어섰는데도 김현수는 안타를 만들어냈다. 밴치에 앉아서도 상대 팀 투수들의 공을 보고 또 봤다. 그렇게 노력하자 쇼월터 감독은 그에게 선발출전 기회를 줬다. 시즌 타율 0.378(75타수 28안타). 거의 모든 선발 출장 경기에서 그는 안타를 뽑아냈다. 어느새 볼티모어에 없어선 안 될 테이블 세터 2번타자로 우뚝 섰다. 김현수의 안타가 나오면 더그아웃에선 동료들이 열렬한 박수를 퍼붓는다. 야유하던 관중들은 그의 얼굴이 그려진 피켓을 높이 흔들며 환호한다. 뛰어난 타격 실력에 인성, 동료들과의 친화력까지 갖춰 진정한 빅리거로 거듭난 모습이다.
8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캠든야드에서 벌어진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경기. 김현수의 표정은 유난히 밝았다. 이날 2번 타자 겸 좌익수로 출전해 5타수 2안타 1득점으로 시즌 8번째 멀티히트를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특유의 컨택트 능력이 빛났다. 1회말 무사 주자 1루의 첫 타석에서 캔자스시티의 ‘악동’으로 불리는 선발투수 요다노 벤추라와 마주했다. 초구를 지켜본 김현수는 2구째 시속 97마일(약 156㎞) 투심 패스트볼을 밀어쳐 3루 베이스와 3루수 사이를 관통하는 안타로 연결했다. 스트라이크존을 한참 벗어나는 강속구였지만 스윙은 간결했다.
2회말 1사 이후 찾아온 두 번째 타석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0볼-2스트라이크의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벤추라의 3구째 84마일(약 135㎞) 커브는 타석 근처에서 무릎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러나 타격기계에게 칠 수 없는 공이란 없었다. 김현수는 여유 넘치는 스윙과 함께 2루 베이스 옆을 지나는 안타를 때렸다.
나머지 타석에서도 모두 배트에 공을 맞추며 컨택트 능력을 뽐냈다. 5회말에는 2루수 땅볼을 쳤으나 잘 맞은 타구였다. 6회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는 캔자스시티의 바뀐 투수 완첸밍과의 승부에서 가운데 담장 바로 앞에 떨어지는 중견수 뜬공을 때렸다. 8회 마지막 타석에서는 오른쪽 담장 너머로 홈런성 파울 타구를 날려 중계방송 해설자들을 흥분케 했다. 시즌 2호 홈런이 될 뻔한 아쉬운 타구였다.
김현수는 5회말 벤추라와 매니 마차도의 신경전으로 촉발된 벤치클리어링 때는 팀에 흠뻑 녹아든 모습을 보였다. 벤추라는 마차도의 등 쪽으로 시속 159㎞에 달하는 강속구를 던졌다. 마차도는 고의성이 다분한 위협구에 화를 누르지 못하고 헬멧을 집어던졌다.
김현수는 벤추라와 마차도가 마운드 근처에서 주먹질을 주고받자 팀 동료들과 함께 볼티모어의 더그아웃에서 곧바로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앞장서서 벤치클리어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쇼월터 감독이 몸싸움을 벌이던 김현수를 뜯어말릴 정도였다. 벤치클리어링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도 김현수는 중계방송 카메라에 여러 번 등장했다. 흥분한 동료 마차도를 달래줬기 때문이다. 김현수는 마차도의 어깨를 토닥이며 훈훈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볼티모어는 이날 김현수를 비롯한 타선의 불방망이 활약에 힘입어 9대 1로 캔자스시티를 누르고 3연승을 질주했다. 김현수는 타격뿐 아니라 출루율을 0.449까지 끌어올려 ‘출루머신’의 면모까지 갖췄다. 시즌 초반 겪었던 우여곡절을 이겨낸 김현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다. 코리안 빅리거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행보를 보였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니다. 볼티모어의 주전 좌익수를 바라보는 김현수의 앞날은 밝아 보인다.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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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도 쳐낸다”… 김현수, 타격 기계 ‘ON’
입력 2016-06-09 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