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독수리들의 러브레터 수리 수리∼ 마법을 부리다

입력 2016-06-09 20:03 수정 2016-06-10 00:52
한화 이글스의 한 어린이 팬이 지난달 29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선수들의 자필 편지를 흐뭇한 표정으로 읽고 있다. 한화는 저조한 성적에도 변함없는 팬들의 응원과 선수들의 각성으로 최근 12경기에서 11승 1패라는 대반전을 펼쳐가고 있다. 한화 이글스 제공


한화 이글스 홈구장인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8일 한 관중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한화 야구는 무엇이 매력이냐고 물어봤습니다. 충청도 양반 아니랄까봐 엄청 뜸을 들였습니다. “글쎄유∼ 뭐라고 해야 할까. 참 어렵네유∼.” 그때 그 관중의 초등학생 아들이 대뜸 그랬습니다. “한화 야구는 의리예요. 의리!” 그러자 그 관중이 박수를 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맞네유. 의리가 있지유. 이기든 지든 우린 상관 안 해유∼. 선수들이 열심히 뛰는 모습만으로도 만족하쥬∼.”

그렇습니다. 한화는 현재 꼴찌를 달리고 있습니다. 다른 팀 팬들이었다면 실망감에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겁니다. 그런데 관중들의 충성도는 대단합니다.

한화는 시즌 전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습니다. ‘괴물투수’ 에스밀 로저스를 주저앉혔고, 현역 메이저리거 윌린 로사리오를 데려왔습니다. 자유계약선수(FA)로 정우람을 4년 84억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영입했습니다. 심수창도 가세하며 지난 시즌 과부하가 걸렸던 불펜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연패를 거듭했습니다. 개막 후 4연패에 이은 7연패. 낭떠러지로 내몰렸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야신’ 김성근 감독의 선수 기용 방법과 일부 선수 혹사 논란이 더해지며 프로야구에서 ‘뜨거운 감자’가 됐습니다. 너무 빠른 투수 교체를 의미하는 ‘퀵후크’를 남발했고, 송창식 벌투 논란 등 크고 작은 사건이 뒤따랐습니다. 급기야 5월 5일에는 김 감독마저 병상에 누웠습니다. 70대 중반의 노감독이 허리디스크 수술로 자리를 잠시 떠났습니다. 김광수 감독대행이 임시로 지휘봉을 잡았지만 김 감독이 없는 한화는 2승 10패를 당하며 더 낭떠러지로 몰렸습니다. 5월 24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선 최후의 보루인 에이스 로저스마저 무너졌습니다.

당시 성적은 11승 1무 30패였습니다. 그야말로 처참한 성적이었습니다. 같은 날 1위 두산 베어스는 30승을 거뒀습니다. 9위 kt 위즈와는 7게임이나 벌어졌습니다. 4위 SK와의 승차는 무려 11게임이었습니다. 이제 꼴찌는 당연하고 자칫 시즌 100패라는 역대 최악의 팀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습니다. 팀을 이 지경까지 만든 김 감독과 ‘똑딱이 타자’로 전락한 4번 타자 김태균에 대한 비난이 인터넷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 정도 되면 보통 팬들은 경기장에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올 시즌 홈 관중 매진 1위는 한화입니다. 네 번이나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원정 관중 동원 수도 한화가 가장 많습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따르면 올 시즌 한화의 원정 관중 수는 42만9991명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인기 구단 ‘엘롯기’(LG·롯데·KIA)보다 더 많은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습니다. 2위가 KIA(37만4764명), 3위가 롯데(34만7583명), 4위가 LG(33만9038명)였습니다. 이들 세 팀과 첫 번째 숫자가 다를 정도로 한화 팬들은 꼴찌 팀을 열렬히 응원했습니다.

그렇게 5월이 흘러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급격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선수들이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며 응원해준 팬들에게 응답하기 시작한 겁니다.

지난달 29일 한화생명이글스파크 1만3000석에는 작은 종이가 촘촘히 꼽혀 있었습니다(흑백사진). 광고 전단지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선수들이 자필로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혹사와 벌투 논란의 중심에 섰던 송창식은 이렇게 썼습니다. ‘저희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여러분도 같이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응원해주세요. 진심입니다!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간판타자 김태균도 이렇게 적었습니다. ‘여러분의 응원이 저희 힘의 원천입니다. 육성응원 들을 때마다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열심히 뛰겠습니다. 도약하겠습니다.’

이후 한화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김 감독까지 복귀하며 9일까지 13경기에서 11승 2패라는 기적을 일궜습니다. 특히 지난 주말 삼성 라이온즈와의 3연전은 압권이었습니다. 세 경기 모두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두 경기는 연장 접전 끝에 승리를 거뒀습니다. 당시 5일 경기는 인터넷으로 무려 27만명이 관람했습니다. 그날 해외 영화 ‘엑스맨 아포칼립스’를 본 관중이 23만명이었다고 합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치고 한화 경기가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화는 지난해 끈끈하고 중독성 있는 플레이를 펼쳐 ‘마리한화’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습니다. 드디어 ‘마리한화’가 부활한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만난 김대환(45)씨는 “선수들의 편지 내용이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운동만 해서 글씨도 못 썼는데 그게 더욱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 편지를 내 사무실 책상에 깔아놨다”고 흐뭇해했습니다. 그는 한화 팬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충청도 양반입니다. 다른 팀 팬들처럼 점수 차가 크게 벌어져도 경기장을 떠나지 않습니다. 지고 있어도 열심히 응원합니다. 관중석에서 욕설도 하지 않습니다.”

이제 한화는 꼴찌에서 벗어나기 일보직전입니다. 9위 kt와 단 한 경기 차입니다. 그리고 5위 SK와의 승차도 4게임밖에 안 납니다.

김씨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 응원할 겁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매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최고참 조인성은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늘 의리 있게 우리 곁을 지켜주신 팬 여러분이 계서서 힘이 납니다. 언제나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같이 끝까지 달립시다.”

한화는 8회 모든 앰프를 끄고 팬들이 “최·강·한·화”를 외치는 ‘육성응원’으로 유명합니다. 9일 경기에서도 8회 말이 되자 “최·강·한·화”의 목소리가 야구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팬과 선수가 하나돼 독수리는 화려한 비상을 시작했습니다.

대전=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