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한국의 상징이었던 조선업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빅3라고 불리는 대형 조선사들 모두가 자체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제시하고 채권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외부 지원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에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어려움이 일시적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 가지 이상한 일은 투기등급 이하로 떨어진 대우조선해양을 제외하고는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의 신용등급이 A등급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용평가사들은 이 조선사들의 재무 상태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지만 대주주인 계열사들의 지원 가능성을 감안할 때 무리하게 높은 신용등급 부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신용등급 산정 시 계열사 지원 가능성을 감안하는 것이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게 아니므로 그 자체를 가지고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다만 계열사 지원 가능성이라는 게 지극히 주관적이고 계량화가 힘든 것이어서 신용평가사의 자의적 판단이 상당히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신용평가사들의 조선사들에 대한 태도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신용평가사들은 신용등급을 부여하고 평가 대상 기업으로부터 대가를 수취한다. 복수의 신용평가사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이치다. 신용평가사의 눈치 보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중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로 구조적인 문제다.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신용평가사에 대한 강력한 규제와 감독이 가해지고 있으나 이로 인해 신용평가사가 눈치를 볼 대상이 하나 더 늘어나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한다.
조선사의 신용등급 강등은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는 추가적인 자금 조달을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각종 파생상품이나 채권 조기 상환 요구 조항과 연계돼 있어 신용등급이 하락되는 경우 해당 기업이 감당하기 불가능한 자금 압박이 가해지기도 한다. 조선사와 같이 덩치 큰 채무자가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 금융시장에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는 금융 당국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사태임을 신용평가사들이 잘 알고 있다. 신용평가사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당국의 심기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구조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부정확하거나 시기를 놓쳐 발표되는 신용평가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데 이는 고스란히 투자자 손실로 귀착된다. 그간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논의가 이뤄져 왔다. 그럼에도 회사채 시장의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막혀 관련 논의가 오랫동안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계열사 지원 가능성을 배제하고 산정한 독자 신용등급을 별도로 발표하도록 강제해 보다 투명한 정보를 투자자에게 제공해야 할 것이다. 더하여 신용평가사의 고의나 중과실로 인해 신용평가 결과가 왜곡되고 그로 인해 투자자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 손해배상 책임을 무겁게 지움으로써 신용평가사가 외부 눈치를 볼 유인을 줄여주는 조치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투자자가 신용평가 비용을 지불하도록 함으로써 신용평가사가 투자자 이익에 봉사하도록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비용을 지불하는 투자자에 대해 신용평가 결과를 먼저 공개한다든지 채권 거래에 대해 수수료를 부과해 신용평가사에 배분하는 등의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돼 있다. 채권시장 침체가 우려된다든지 외국 사례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제도 개혁이 지연돼 투자자가 손해를 보는 상태가 계속돼서는 안 될 것이다.
박창균 경영학부 중앙대 교수
[경제시평-박창균] 못 믿을 신용등급
입력 2016-06-07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