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나미] 진정한 삶의 지향점

입력 2016-06-07 17:57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죽음을 앞에 두고 ‘이것이 너에게 남기는 전체이며 하나라는 구절이 새겨진 거대한 돌’을 보는 꿈을 꾼다. 그의 꿈에는 열려진 넓고 네모난 광장으로 이동하는 커다란 배, 광장 한복판에 황금 뿌리를 가진 나무가 지구를 둥글게 감싸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돌에 새겨진 ‘하나이며 전체’라는 선언, 다른 세상으로 가는 배, 황금의 나무 같은 이미지들은 죽음이라는 과제를 언젠가 맞닥뜨려야 할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하찮은 돌, 이름 없는 나무,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배, 모두 우리 삶과 죽음의 한 단면들이라고 볼 수 있다.

무한한 우주 공간의 극히 미세한 점에 불과할 뿐인 우리지만 ‘지복의 아름다운 저세상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삶을 이해한다면, 유한한 시간을 훨씬 더 값지게 쓸 것 같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 아니냐고 쉽게 묻지만 ‘언제나 행복한 인생’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우리가 그런 희망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예수님도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았는데 무슨 자격으로 우리가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사람은 욕망하는 불완전체일 뿐이다. 평안하면 권태를 호소하고, 변화 앞에선 불안과 걱정에 휩싸인다. 가질 수 없는 행복을 욕망하면 욕망할수록 실제의 삶은 더 비루해질 뿐이다. 하지만 소소한 생활의 작은 조각들이 자신과 공동체의 구원과 평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그나마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견디는 힘을 지닐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삶은 먼지로부터 시작해 먼지로 돌아가겠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부여된 채 태어난 것이다.

가까이는 위험한 작업 현장에서 다치거나 죽어야 했던 이름 없는 수많은 근로자들, 6·29선언을 이끌어냈던 이한열 박종철, 4·19를 촉발시켰던 김주열, 몸을 불살라 비인간적인 노동현장의 참상을 알린 전태일 같은 젊은이들부터, 멀리는 6·25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와 독립투사들까지 그들 삶의 지향점은 ‘행복’이 아니라 ‘의미’였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많이 나누고 남을 섬기라는 명령을 받고 태어난 것인데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순국선열들이 만약 자신의 행복만 추구해 나라야 망하건 말건, 독재가 횡행하건 말건 세상일에 무관심했다면 아마 지금 우리의 삶은 아주 많이 끔찍하고 처참할 것이다. 역사를 선하고 풍요롭게 진화시킨 것은 소수의 똑똑한 정치인과 경제인들이 아니라 말없이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마침내는 생명까지 바치는 민초들이 아니었는가.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이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허언과 헛발질만 거듭해도, 결국 지혜롭고 인내심 많은 민중들이 호의호식하는 권력자들이 싸 놓은 오물을 치우고 새로운 사회를 열었던 것이 우리의 과거이자 역사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 구멍 난 철모가 전시된 것을 보며 시끄러운 총성, 대포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울음과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혼자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있다. 죽은 병사들의 영혼이 아들 가진 어미의 마음을 건드린 탓이었을까. 나와 내 가족의 안온함을 위해 누군가가 고통 속에 죽어갔고, 앞으로도 또 그럴 것이라면,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게 된다. 촘촘한 인연의 빚들을 의식한다면 걸음 하나, 말품 하나도 더욱 조심스러워질 것 같다. ‘호국영령을 기린다’는 상투적 구호, 알맹이 없는 정치적 수사만 가득한 6월이다. 후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죽은 혼령들 앞에 그저 죄송스러울 뿐이다. 국립묘지를 찾는 가족들의 눈물을 접할 때마다 다시 묻는다.

너는 왜 이 세상에 왔고, 무슨 흔적을 남기고 가느냐? 세상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매서운 질문은 공동체에 갚을 수 없는 빚만 잔뜩 지고 있는 악성 채무자인 스스로를 다시 부끄럽게 만들 뿐이다.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