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딸’이라는 오명(汚名)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5일(현지시간) 남미 페루에서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93% 개표 현재 경제관료 출신인 ‘변화를 위한 페루인당’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77)가 알베르토 후지모리(77) 전 대통령(1990∼2000 재임)의 딸인 ‘민중권력당’의 게이코 후지모리(41)를 약 10만표 차이인 0.6% 포인트 앞섰다고 페루 중앙선관위(ONPE)가 밝혔다.
투표 종료 직후 현지 여론조사 기관 출구조사 결과 쿠친스키는 50.6%를 기록해 49.4%인 후지모리를 근소하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쿠친스키는 페루 독립기념일인 다음달 28일 대통령에 취임해 5년 임기를 시작한다.
두 후보 모두 좌파 성향인 현 정권과 달리 중도우파 성향에 친(親)시장주의자란 점에서 이번 페루 대선은 최근 남미에서 부는 ‘좌파 심판’ 바람과 일맥상통한다. 그 가운데 국민이 독재에 대한 향수보다 국제경제 전문가의 경륜을 더 높이 평가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대선은 초반부터 ‘후지모리 돌풍’으로 주목받았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딸로 아버지가 재임 중이던 1994년 이혼한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를 맡은 후지모리는 아버지 재임 시절을 그리워하는 빈민·서민층 지지에 힘입어 지난 4월 1차 투표에서 40%의 지지를 얻었다. 1차 투표에서 과반 지지를 얻지 못할 경우 결선투표를 치르는 페루의 대선 절차에 따라 결선투표를 치렀다.
아버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기존의 정치 엘리트 집단과 다른 일본계라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1990년 집권한 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경제 성장을 견인해 서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치안을 위협하던 게릴라도 소탕했으나 그 과정에서 대량 학살을 지시한 것이 논란이 됐다. 또 장기 집권을 위해 야당 의원을 매수·사찰하는 등 비리가 뒤늦게 드러나 실각했고 결국 일본으로 도주했다. 2007년 칠레에서 체포된 그는 학살 지시 등의 혐의로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빈민·서민층 중에는 그의 재임시절을 그리워하며 딸이 그 뒤를 따르기 바라는 유권자도 많았다. 반면 대도시에서는 ‘실패한 독재자’의 딸 후지모리의 집권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2011년 대선에서도 후지모리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1차 투표에서 선전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사면하겠다고 했다가 거센 역풍을 맞고 오얀타 우말라 현 대통령에게 패했다. 이번 대선에서 후지모리는 “가족이 혜택을 보기 위해 정치권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BBC는 “자신은 알베르토 (전 대통령)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알베르토의 유령이 계속 따라다닐 것”이라고 분석했다.
쿠친스키는 영국 옥스퍼드대와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한 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에서 근무한 국제경제 전문가다. 미국 금융권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재무장관 등 장관직을 수차례 역임했다. 이 때문에 2010년 8.8%를 정점으로 계속 감소세에 있는 페루의 경제성장률을 견인할 구원투수로 꼽힌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월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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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딸’ 후지모리, 끝내 주홍글씨 못 지우나
입력 2016-06-06 18:43 수정 2016-06-07 0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