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재호] 제3의 길, 공화정치의 실험

입력 2016-06-06 19:47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1항이다. 이 조항을 무소속 유승민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이 최근 며칠 간격을 두고 주거니 받거니 언급해 정치권의 화제가 됐다. 유 의원이 지난달 31일 성균관대 특강에서 먼저 꺼냈고 김 의원이 지난 4일 한 포럼에서 “공교롭게도 요새 저와 유 의원이 비슷한 처지”라고 맞장구쳤다.

헌법 제1조1항은 유 의원의 전매특허나 다름없었다. 그는 지난해 7월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라고 낙인찍음에 따라 원내대표를 쫓겨나다시피 그만둘 때 헌법 1조1항의 지엄한 가치를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발언들이 새롭게 느껴진 건 지난 4월 20대 총선 결과 확 달라진 정치지형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두 사람은 공천탈락과 지역주의란 난관을 뚫고 4선에 성공, 각각 보수와 진보 진영 차세대 리더로 부상한 점에서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민주공화국’ 가운데 ‘민주’ 아닌 ‘공화국’에 방점을 찍은 게 특별히 뇌리에 꽂힌다. 1987년 현행 헌법 개정 이후 민주화를 거치면서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꽤 신장된 반면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의 존속과 안정을 꾀하는 공화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진단한 것 같다. 유 의원은 “계층과 신분이 대물림되고 능력주의가 파괴되며 부패·불공정이 만연하는 사회는 공화국이 아니다”고 했고, 김 의원은 “(나라) 형편이 어려우니 각자 살라고 하는 건 공화국이 아니다”고 일갈했다. 두 사람이 지향하는 공화주의는 저성장·양극화·불평등·불공정 문제를 치유하고 해결하는 이념(유 의원)이고 자본과 노동,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남과 북의 공존과 상생, 즉 ‘함께 책임질 나라’의 건설(김 의원)이다.

공화주의는 아직 거시적인 정치 담론의 성격이 강해 이상론에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보수의 친박과 진보의 친노 진영 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구도에서 헌법 가치와 사상을 내건 제3의 길, 즉 중도(middle ground) 정치를 표방한 측면이 강하게 비친다.

이런 점에서 지난 4·13총선 전에 제3의 길을 선택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와도 정치사상적 맥이 닿아 보인다. 그는 지난 3월 29일 총선 직전 참석한 관훈토론회에서 “지난 10년간 한국 정치는 헌법 1조1항에서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재창조를 위한 새로운 선택을 천명했다. 그 결과, 모두의 예상을 깨고 38석으로 제3당의 반열에 올랐다.

그래서 공화주의에 대한 담론이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오는 ‘고래에 통 던지기’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난파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호(배)를 구하고자 공화주의(통)를 성난 국민(고래)에게 작금의 시대정신으로 제시한 격이다.

이 비유는 1780년대 미국 연방헌법과 ‘미국판 권리장전(Bill of Rights)’으로 불리는 수정헌법 제정 당시를 설명할 때 등장한다. 근대적 공화주의로 평가받는 독립혁명기와 건국 초기 정치상황은 국내에서 ‘중도의 정치-미국 헌법제정사’란 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당시 헌법기초자들은 13개 나라(States)의 ‘연합’도, ‘단일국가’도 아닌 제3의 ‘연방국가’라는 중도를 택했다. 그것도 ‘회의(Convention)’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중도를 채택해 ‘필라델피아 기적’으로 불린다. 그 후 권리장전 채택도 그랬다. 그 중심에 바로 미국 헌법의 아버지이자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제임스 매디슨이 있었다.

아직은 친박과 친노란 현실의 절벽 앞에서 세(勢)마저 미약한 중도정치 실험이 미국의 그것처럼 기적을 일궈나갈 수 있을지 진지하게 지켜볼 일이다.

정재호 편집국 부국장 jaehoje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