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의 기적 <2>] 빈곤과 질병 달고사는 아이들… 거친 운동장 맨발로 달려

입력 2016-06-07 20:47 수정 2021-03-31 17:11
아프리카 잠비아 무다냐마에 사는 소녀 그레이스(6)가 웃통을 위로 젖히고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소아과 전문의 심병안 집사에게 꺼내 보이고 있다. 그레이스는 이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의사를 만났다. 무다냐마 초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이 방문단을 환영하고 있다. 대부분 맨발로 흙길 위에 서 있다(왼쪽부터).

마을에 의사가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엄마들은 아이의 손을 붙들고 의사 앞으로 몰려들었다. 유난히 눈이 맑은 소녀 그레이스(6)가 웃통을 위로 젖혔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가 드러났다. 식사를 할 때마다 아프다고 했다. 소녀는 그렇게 7년 동안 고통을 참으며 음식을 삼켜야 했다. 충북 청주 청북교회(박재필 목사) 해외선교부장인 소아과 전문의 심병안(62) 집사가 소녀의 배를 지긋이 눌러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는 이대로 방치하면 안돼요. 간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비대해졌어요. 종양이 의심되지만 정확한 원인을 찾기 위해선 빨리 병원에 가야합니다.”

◇의사 없는 마을=이 마을엔 병원이나 보건소가 없다. 그레이스의 병을 고쳐 줄 의사도 없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7시간 걸려 도착한 아프리카 잠비아 수도 루사카에서 또 다시 북서쪽으로 892㎞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무다냐마의 작은 마을 카냔다. 이곳의 병자(病者)들은 밀려오는 고통을 그저 온몸으로 참아내야 했다. 오른팔이 불에 녹아버린 아이, 간질로 고통 받는 아이, 귀에 염증이 생겨 제대로 듣지 못하는 아이들이 예수님 앞에 나온 한센병 환자처럼 차례로 심 집사 앞에 섰지만 치료 도구나 약품이 없으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심 집사는 “해외 의료선교를 나가면 아픈 사람들을 장기적으로 관리할 수 없어서 항상 아쉬웠는데, 이곳 아이들은 일차적인 진료마저도 불가능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세계 각지의 어려운 어린이들을 돕는 월드비전은 그레이스를 치료할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월드비전은 잠비아 무다냐마 지역의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있는 청북교회 박재필 목사팀과 함께 지난달 22∼28일 이곳을 방문했다.

방문단을 태우고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던 사륜구동 차량이 갑자기 멈춰 섰다. 길바닥에 있던 뾰족한 물체가 타이어에 박혀 펑크가 난 것이다. 이런 곳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농구공을 차고 있었다. 지구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가 보냈을 이 농구공도 구멍이 났는지 공기가 다 빠져 튀질 않았다. 타이어와 농구공을 터트린 무언가가 언젠가 아이들의 발을 찌를지 모를 일이다.

무다냐마에선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있는 여자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스물이 채 안됐거나, 심지어 이제 갓 중학생인 됐을 것 같은 엄마들도 있었다. 10대들의 임신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건 산모들이 아이를 출산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수십㎞ 떨어진 보건소까지 걸어가다가 길가에서 산모나 아이가 숨지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나마 월드비전이 다음 달 완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분만실이 마을 주민들의 희망이다. 월드비전 충북본부 장영진 본부장은 “10대들의 임신과 에이즈 감염이 빠르게 늘고 있다”며 “현지 봉사자들을 대상으로 보건교육을 하고 있지만 이곳의 보건환경은 여전히 열악한 실정”이라고 전했다.

한 소녀가 무다냐마 초등학교 교실에서 비눗방울을 불고 있다.

◇우물 파준 교회=마을 주민들은 방문단을 데리고 산속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20분 정도 걸으니 지름이 70㎝정도 돼 보이는 물웅덩이가 나왔다. 우기(10월부터 이듬해 4월)에는 산속에 있는 배설물이 빗물에 섞여 물웅덩이 속에 흘러들어간다. 주민들은 몇 달 전까지 이 오염된 물을 퍼 마셨다. 이 때문에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풍토병인 빌하지아(bilhazia)를 앓거나 설사로 고생하곤 했다. 다행히 지난해 8월 마을에 40m 깊이의 우물이 생겼다. 청북교회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주민들이 깨끗한 물을 마시도록 월드비전에 후원금을 내놓았다. 현재 51가정이 이 우물을 사용하고 있고 인근 다른 마을에서도 깨끗한 물을 마시기 위해 우물을 찾는다. 한 주민은 “이 우물은 하나님이 우리 마을에 주신 은혜”라며 “우물을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해 주민들로 구성한 식수위원회도 구성했다”고 말했다. 박재필 목사는 “이 우물이 마을주민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한국과 이곳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한국에도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부녀(父女)가 하고 싶었던 말=손만 내밀고 있어서는 빈곤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무다냐마의 빈자(貧者)들은 알고 있었다. 이들은 당장 먹고 살기 어려운 처지에도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해 1월 월드비전이 세운 무다냐마 초등학교 입구에 세워진 간판엔 ‘Knowledge is power(아는 게 힘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방금 영어수업을 마친 듯 교실 칠판엔 영어문장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고, 아이들은 맨발로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그때 한 아버지가 10살이 채 안돼 보이는 딸의 손을 잡고 월드비전 손제덕 대리 앞에 섰다. 코밑에 콧물자국이 묻어있던 딸은 더 어린 동생이 있는지 허리에 포대기를 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 했지만 언어가 다른 외부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애처로운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손 대리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주민들이 외부에서 온 방문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무다냐마엔 4500명 정도의 아이들이 살고 있고, 이 중 3662명이 월드비전 후원자들과 일대일 결연을 맺고 있다. 아마도 남자의 딸은 후원을 받지 못하는 800여명 중 한 명일 것이다. 그 소녀의 발에도 신발은 신겨져 있지 않았다.

박재필 목사가 잠비아 무다냐마에서 자신이 후원하는 카스토 제인(11·여)의 어깨를 감싸고 밝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박재필 목사가 제인에게 받은 편지

“올해엔 글쓰기 배우고 싶어요”


박재필(청주 청북교회) 목사는 11살 소녀 카스토 제인을 한눈에 알아봤다. 깍지를 낀 채 수줍은 듯 뒷짐을 지고 있던 제인에게 다가가 꽉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2014년 6월부터 이 소녀를 후원하고 있다. 박 목사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지난해 2월 제인에게서 받은 편지다. 편지엔 제인의 사진과 함께 “올해엔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박 목사는 한국에서 준비해 간 펜과 공책을 제인에게 선물했다.

제인은 작은 붉은색 벽돌집에서 아빠 엄마 오빠 여동생과 함께 산다. 아프리카 식용작물인 카사바를 재배해 생계를 유지하는데 1년에 100크와차(약 1만1000원) 정도 번다. 제인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카사바를 빻거나 집안일을 돕는다. 제인의 꿈은 선생님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박 목사는 제인의 손을 꼭 붙들고 기도했다.

“제인과 그의 가족이 항상 건강하게 해 주세요. 늘 힘내고 용기 낼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이들이 알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잘 믿어서 이 아이가 잠비아의 미래가 되게 해 주세요.”

청북교회 교인들은 제인 같은 잠비아 무다냐마 지역의 아이들 250명 정도를 후원하고 있다. 그들은 예배당 입구에 이 아이들의 사진을 걸어놓고 기도하고 있다. 박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작은 자를 통해 남모르는 곳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걸 이번 방문을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다”며 “이곳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지 않도록 교인들을 격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다냐마(잠비아)=글·사진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