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자주 와.”
아이들을 부산에 있는 아빠에게 데려다 주고 뒤돌아 나오는데 작은 아들이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딸은 머리를 숙이고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손만 만지작거렸다. 아마 딸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두 아이를 떠나보내고 나는 쓸쓸이 서울로 올라왔다.
부산에 갔다 온 뒤 꼬박 사흘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누워만 지냈다. ‘내 삶의 전부였던 아이들이 없는데 돈은 벌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냥 이대로 사라져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죽음이란 걸 떠올렸다.
‘엄마 자주 와. 엄마 자주 와.’ 꿈이었을까. 의욕을 잃고 누워만 있을 때 아들의 음성이 저만치서 들리는 듯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래선 안 된다. 정신을 차리자.’ 어머니가 만들어준 죽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우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찬 공기를 들이키며 얼마나 걸었을까. 전봇대에 붙어있는 부흥집회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유명 부흥강사인 고 최자실 목사님의 집회였다.
3일 연속 부흥집회에 참석했다. 집회 마지막 날 최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 시간부터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고자 하는 사람은 일어나세요.” 무엇인가에 이끌린 듯 나도 모르게 스르르 일어섰다. 그리고 집회가 열린 도봉순복음교회(현 순복음한성교회)에 등록하고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함동근 담임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지금의 상황을 고백했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많이 슬프다고 했다. 삶의 의미가 없어 일할 맛도 안 난다고 했다. 함 목사님은 정말 따뜻하게 위로해주셨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벽에 교회로 가는 시간도 즐거웠다. 주님과 대화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마음의 상태를 전하기도 하고, 찬송가도 흥얼거렸다. 새벽에 무릎을 꿇고 지나온 과거들을 낱낱이 고하며 회개기도를 드렸다. 특히 아이들에게 엄마로서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매일같이 눈물 뿌려 기도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당시 내 모습은 정말 보잘 것 없었다. 이혼했고 아이들도 아빠한테 보냈다. 여자 혼자 작은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으니 남들 보기에 얼마나 처량하고 불쌍했을까. 하지만 그때가 가장 성령충만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쌍해 보였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다녔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을 소개하는 재미로 살았다. 안수기도를 하면 다 나을 것도 같았다. 실제로 배가 아프다는 조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정말 낫기도 했다. 그땐 주님에 대한 첫사랑으로 불타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를 그렇게 기도하며 이겨냈다.
뜨겁게 주님과 교제하면서 다시 의욕을 찾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사법시험에 도전해보자. 어차피 다시 인생을 살 거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어려운 시험에 도전하자. 다시 아이들을 만났을 때 ‘엄마 열심히, 성실히 잘 살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떳떳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역경의 열매] 박춘희 <6> 두 아이를 아빠에게 보내고 나서 깊은 절망
입력 2016-06-05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