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각하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는 어떤 모습인가.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말끔한 수트를 차려입은 백인 남성 이미지가 떠오를 테다. 미모의 본드걸이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킨다. 1962년 시리즈가 시작된 이래 이 공식은 깨진 적이 없다.
54년을 이어온 이 공고한 역사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007 카지노 로얄’(2006)부터 네 편에 출연한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가 시리즈에서 하차하면서 다양한 후보들이 거론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여배우 캐스팅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 007’이 탄생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관측이다.
차기 제임스 본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현지 SNS는 007 가상 캐스팅 논의로 열기가 뜨겁다. ‘여성 제임스 본드가 나올 때가 됐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후보는 드라마 ‘X파일’로 유명한 미국 여배우 질리언 앤더슨이다. 그의 사진을 합성해 만든 007 포스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앤더슨 본인도 제임스 본드 역할에 대한 의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지난달 22일(현지시간) 트위터에 해당 이미지를 직접 게재하고 “성원에 감사드린다. 포스터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화답했다.
미스월드 출신 인도 여배우 프리앙카 초프라도 출사표를 던졌다. 지난달 23일 미국 콤플렉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본드걸 역을 맡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나는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고 싶다”고 답했다.
007 외에도 여성 캐릭터를 앞세운 속편을 내놓겠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히어로물 속 여성 비중이 커진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엑스맨 시리즈를 탄생시킨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지난 1일 엠파이어 팟캐스트에 출연해 “만약 엑스맨 캐릭터로 솔로 무비를 만들게 된다면 ‘미스틱’을 다루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인기 여배우 제니퍼 로렌스가 연기한 미스틱은 원년 엑스맨의 홍일점 캐릭터다.
미스틱 솔로 무비 제작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엑스맨: 아포칼립스’를 끝으로 로렌스와 제작사 폭스와 사이의 출연 계약이 만료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렌스가 여러 인터뷰에서 엑스맨 시리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만큼 가능성은 아직 유효하다.
마블 첫 여성 히어로 영화 ‘캡틴 마블’도 점차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2018년 라인업에 포함된 영화는 현재 캐스팅 단계에 있다. 주인공 캐럴 댄버스 역에 에밀리 블런트, 레베카 퍼거슨, 샤를리즈 테론 등이 거론된 가운데 브리 라슨이 가장 유력하게 꼽히고 있다.
이와 관련해 남녀 배우간 임금 격차 문제로 갈등을 빚은 할리우드에서 여배우들의 역할이 확대되는 움직임은 매우 긍정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할리우드 임금 성차별 갈등은 2014년 말 북한이 미국 제작사 소니 픽처스의 서버를 해킹한 뒤 배우들의 출연료 정보가 유출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비슷한 비중의 역할일지라도 남자 배우의 출연료가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제니퍼 로렌스, 패트리샤 아퀘트, 아만다 사이프리드, 엠마 톰슨 등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국내 영화계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는 여배우가 극의 중심이 되는 작품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변화의 움직임이 국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여자 007 나오나… 007·히어로 영화에 부는 여풍
입력 2016-06-05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