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문제는 찬란한 외침이 아니라 쓰디쓴 확인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 알베르 카뮈는 수필집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영락없이 한국 대표팀이 2일 새벽 스페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축구를 지칭하는 듯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 1년 이상 무패를 자만하던 슈틸리케호의 민낯은 세계적 강호와의 단 한 경기에서 모든 걸 드러냈다.
경기 전까지 우리 선수와 감독은 자신만만했다. 심지어 이기겠다는 전의까지 넘쳤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현실은 초라했다. 전력 열세가 너무나 뚜렷했고, 그걸 극복할 전술도 패기도 조직력도 없었다. 16경기 연속 무패와 10경기 연속 무실점. 모두 허수였다. 약한 적을 골라 승승장구하며 승리에 심취하던 동안 더 높아진 세계의 벽은 손에 닿지 않을 만큼 멀어져 있었다. 한국축구가 20년 만에 6실점 참패를 당했다.
울리 슈틸리케(62·독일) 감독이 지휘한 한국 축구대표팀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레드불아레나에서 스페인에 1대 6으로 대패했다. 스페인은 슈틸리케 감독이 2014년 9월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하고 고른 가장 강력한 상대다. 유럽 팀과의 대결 자체가 슈틸리케 감독의 지휘 아래 처음이다. 한국 입장에선 무승부조차 장담할 수 없지만 강호를 공략할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만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경기였다.
하지만 내용부터 결과까지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6실점은 1996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시안컵 이란과의 8강전(2대 6 패)으로부터 20년 만이자 슈틸리케 감독 체제에서 최다 실점이다. 전력의 열세, 전술의 부재부터 정신력 붕괴까지 어느 한 곳을 지목할 수 없을 만큼 곳곳에서 문제점이 나타났다.
스페인은 사흘 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했던 세르히오 라모스(30·레알 마드리드), 후안프란(31), 코케(24·이상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빼고 사실상 1.5군의 전력을 꾸렸다. 하지만 최전방에 알바로 모라타(24·유벤투스), 중원에 안드레 이니에스타(32·바르셀로나), 다비드 실바(30·맨체스터 시티), 세스크 파브레가스(29·첼시)가 포진한 스페인의 전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슈틸리케 감독이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채택한 전술은 전방압박이었다. 수비보다 공격에 집중해 상대를 강하게 몰아붙이면 스페인의 현란한 패스워크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는 구상이었다. 이런 전술은 전반 7분 원톱 스트라이커 황의조(24·성남), 왼쪽 공격수 손흥민(24·토트넘 홋스퍼)이 연달아 득점 기회를 잡으면서 통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스페인의 패스워크가 살아난 전반 중반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미끄러운 잔디에 적응한 스페인은 일방적으로 한국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전반 29분 실바의 프리킥 선제골을 시작으로 2분 뒤 파브레가스, 8분 뒤 모라타의 추가골이 터졌다. 전방압박 이외의 전술이 없었던 한국은 번번이 공수 전환에 실패했다. 촘촘하지 않은 수비진은 이니에스타의 패스 한 번에 허둥거렸다. 조직력과 정신력까지 무너졌다. 파브레가스의 추가골은 골키퍼 김진현(29·세레소 오사카)이 수비수 장현수(25·광저우 푸리)의 헤딩 백패스를 예상하지 못하고 놓치는 과정에서 헌납했다.
대표팀에는 실패한 전술을 대신할 2차 전술, 즉 ‘플랜 B’도 없었다. 후반전에 일부 선수들을 교체했지만 4-2-3-1 포메이션과 전방압박은 그대로 이어졌다. 약체가 강호를 상대할 때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압박수비와 빠른 역습은 훈련되지 않은 한국에 기대할 수 없었다. 스페인은 포메이션을 4-1-4-1에서 4-3-3으로 유연하게 바꾸면서 한국의 골문을 유린했다. 그렇게 후반전에 3골을 추가했다. 스페인이 유로 2016을 앞두고 전력을 점검하기 위해 센터백과 골키퍼의 백업 요원을 투입하지 않았으면 후반 38분 수비형 미드필더 주세종(26·서울)의 만회골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2015 호주아시안컵, 2018 러시아월드컵 2차 예선 등 아시아권 대회를 장악하고 자메이카 뉴질랜드 태국과 같은 약체만 골라 싸우면서 쌓은 16경기 연속 무패, 10경기 연속 무실점의 거품을 확인했다는 정도가 그나마 이 경기를 통해 수확한 성과다.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를 마치고 “이렇게 큰 차이가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한국은 오는 5일 오후 10시(한국시간) 프라하 에덴아레나에서 체코와 두 번째 유럽 원정경기를 갖는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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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03 0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