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춘희 <5> 분식집 운영하면서 약자의 설움 톡톡히 경험

입력 2016-06-02 19:42
1978년 부산대 졸업식 때 여동생, 친구들과 함께 한 박춘희 서울 송파구청장(오른쪽 두 번째).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 앞에서 ‘식사시간’이란 분식집을 1년여 동안 하면서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 힘없는 약자의 서러움을 특히 빼놓을 수 없다.

며칠 동안 우리 분식집 앞으로 덩치 큰 사내들이 왔다 갔다 하더니 어느 날 골목 끝에 술집 하나가 떡하니 들어섰다. 나를 비롯한 인근 가게 주인들과 상의도 없이 ‘식사시간’ 간판을 거의 가릴 듯한 크기로 술집 간판이 내걸렸다. 골목 끝에 간판을 걸어봤자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지만 그래도 이런 일은 먼저 양해를 구하고 상의하는 게 도리였다. 중간에 상가 일을 맡아주던 분을 통해 수차례 간판을 치워달라고 요청했다. 술집 측에서도 ‘알겠다’고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더니 급기야 일이 터지고 말았다. 일을 맡아줬던 분이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았고 각목 등에 맞아 다친 것이다. 심증만 있고 확실한 물증이 없어 사건은 확대되지 못했다. 결국 술집 간판에 관한 일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한 번은 아침에 새벽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분식집 출근을 위해 버스에 탔다. 장을 본 가방은 앞에 가지런히 세우고 한 손엔 두부를 들었다. 다른 한 손으론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를 했고 나는 저 뒤에서부터 앞으로 시장 가방과 함께 휩쓸려 넘어졌다. 두부는 뭉개지고,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요즘 같으면 버스 기사에게 따져 사과를 받았을 것이다. 치료비도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른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그땐 왜 그렇게 못나게 굴었는지…. 이 땅에서 힘없이 산다는 건 하염없이 처량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간판을 떼어달라고 말하는 게 분명 맞는데도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렇게 약자로서, 자신감 없이 그 시절을 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 아이를 잘 키우려고 시작한 분식집 일이 결국 나와 아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처음엔 돈 버는 재미가 있어 힘든 상황들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분식집을 오픈하고 우리 아이들과 눈 맞추며 함께 놀았던 게 언제인가 싶었다. 온종일 일하고 밤늦게 들어와 겨우 자는 애들 얼굴을 쓰다듬는 게 전부였으니 엄마 마음이 어땠겠는가. 당시엔 일한답시고 친청 부모님에게 아이들 맡기는 것도 주변의 눈치가 보였다. 물론 부모님은 누구보다 손자손녀를 잘 키워주셨지만 말이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이혼한 애들 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은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그는 “분식집을 하느라 바쁘니 내가 아이들을 데려가 안정되게 키우겠다”고 했다. 나는 이 말에 변명 한 번 제대로 못했다. 아이들을 잘 키우려고 데려왔지만 막상 돈 버느라 아이들은 뒷전이었다.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아이들을 아빠에게 보내기로 결심했다. 지금보단 나은 환경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게 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힘든 결정이었다. 품안에서 자식을 떠나보내고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힘든 시간을 ‘기적의 드라마’로 만드셨다. 온전히 주님을 만나게 하셨고, 새로운 역전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셨다. 눈물이 웃음이 되고, 절망을 소망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를 사는 나의 인생 2막이 시작됐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