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 떨어진 섬인 팔미도(八尾島)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등대가 서 있다. 113년 동안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지켜본 등대다. 정부는 등대의 보존을 위해 이달 안에 보수 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등대 불빛은 뭍사람들에겐 낭만의 불빛이지만 초기 국내 등대 건설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침략의 불빛에 가깝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은 1880년 함경남도 원산항을 일본에 개항한 이후로 인천항, 부산항 등 전국 주요 항구의 문을 열었다. 당시 근대식 등대를 갖고 있지 않던 한국의 바다에서 열강의 배는 암초 등에 부딪히며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특히 한양과 가까워 열강들의 배가 가장 자주 드나들던 인천 앞바다에서 사고가 잦았다. 일본은 조일통상장정을 근거로 1901년부터 인천 바다에 근대식 등대를 지으라고 요구했다. 결국 조선이 1902년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해 5월부터 팔미도에 등대를 짓기 시작했다. 1903년 6월 완공된 이후 팔미도등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불빛으로 열어주며 오욕의 역사를 지켜봤다.
해방 뒤 팔미도등대는 남한엔 승리의 불빛이었다.
인천상륙작전 개시 하루 전인 1950년 9월 14일 오후 7시. 연합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마운트매킨리호에서 최규봉 미 극동사령부 켈로부대(KLO) 부대장에게 15일 0시 팔미도등대에 불을 밝히라고 명령한다. 최 부대장은 국군 3명과 미국 장교 3명을 이끌고 북한군과 교전 끝에 등대를 점령해 15일 새벽 1시45분 드디어 등대의 불을 켠다. ‘작전 개시’ 명령이 떨어지자 15일 오전 6시 206척의 함정에 타고 있던 한·미 해병대 등 7만여명의 군인이 월미도 상륙에 성공한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교착 상태에 있던 한국전쟁의 승기(勝氣)는 남한에 기울어진다. 지금까지도 켈로부대 생존자들은 팔미도등대에서 매년 기념식을 갖는다.
팔미도등대는 2003년 불빛을 멈춘다. 등명기가 노후해 불빛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등대로서의 본기능은 바로 뒤에 지어진 신(新)등대로 넘겨준다. 대신 2006년 등대문화유산으로 선정되면서 관광객이 꾸준히 찾는 명소가 됐다. 2014년 한 건축사가는 “팔미도 현존 등대는 원래 등탑을 허물고 일제가 후대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면서 국내 최초가 맞는지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팔미도등대는 기존 등탑인 것으로 밝혀졌다.
해양수산부는 팔미도등대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해 2억2000만원을 들여 보존을 위한 보수 공사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올 연말 공사는 끝난다.
세종=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113년 동안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 지켜본 ‘팔미도등대’
입력 2016-06-02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