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어머니 몰래 잠시 교회를 다닌 나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교회를 다시 찾았다. 입시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교회에 갔던 것 같다. 그땐 그래도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학생회 부회장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기도는 하지 않았다. 오로지 대학 합격에 관한 기도뿐이었다.
법대나 정치학과에 가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제2의 박순천이 돼라’는 이야기는 어느새 ‘그렇게 되고 싶다’는 소망으로 바뀌었다. 법대에서 공부하는 오빠도 부러웠다. 하지만 예비고사 성적이 좋지 않았고 결국 내 뜻과 상관없이 부산대 의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전공 공부는 뒷전이었다. 막걸리 한 잔에 밤새 토론하는 걸 좋아했다. 법대나 의대에 가서 청강도 했다. 동기나 선후배들은 나를 ‘미스터 박’이나 ‘박군’이라 불렀다. 여학생보다 남학생들과 어울리며 사회활동이나 봉사에도 열심이었다.
교회와는 점점 멀어졌다. 오히려 기독교 불교 가톨릭 등 ‘종교 쇼핑’을 하고 다녔다. 가끔 창조론에 맞서 진화론을 이야기하며 목사님과 논쟁을 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고 ‘잘한다’ ‘똑똑하다’고 칭찬해주니 정말 내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살았던 것 같다.
이런 착각을 깨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정당 선거사무소에서 일하며 행정대학원에 다녔다. 이후 결혼해 딸 아들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에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남편과는 여러 면에서 맞지 않았다. 결국 결혼한 지 8년여 만에 이혼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막막했다. 1988년 두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딸의 처지가 안쓰러웠던 부모님이 부산 살림을 정리하고 동행했다. 그렇게 서울로 이사와 도봉구 방학동에 터를 잡았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했다. 주부로 오래 살다보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쉽게 빨리빨리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요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자주 도와드렸던 나는 요리만큼은 자신 있었다. 혼자서 20명분 음식은 거뜬히 차려낼 수 있었다.
서울 홍익대 앞에 ‘식사시간’이라는 분식집을 오픈했다. 김밥 라면 떡볶이 비빔밥 된장찌개 김치볶음밥…. 대학가 앞이라 장사가 잘됐다. 정말 학생들이 ‘식사시간’만 되면 물밀듯 학교에서 빠져나와 우리 식당으로 들어왔다. 앞치마 호주머니에 쑤셔넣은 돈이 차고 넘쳐 바닥으로 쏟아져내릴 정도였다. 그러면 잠시 허리를 펴고 ‘학생들이 그만 좀 왔으면…’ 하고 바랐다.
하루하루 정말 정신없이 살았다. 새벽시장에서 장을 본 물건을 두 손 가득 들고 방학동에서 홍익대 분식집까지 출퇴근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모님께 아이들을 맡겨놓고 온종일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느새 주객이 전도됐다. 아이들을 잘 키우려고 시작한 일 때문에 나는 오히려 아이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잠든 아이들을 보고 출근한 나는 언제나 아이들이 잠든 뒤에야 집에 들어왔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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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01 2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