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분노… 공감의 연결

입력 2016-06-01 04:02 수정 2016-06-01 07:51
포스트잇이 새로운 추모 도구가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쉽게 뗐다 붙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닮았다고 본다. 슬픔, 아픔 등 감정을 공유하는 수단으로 SNS를 이용하듯 포스트잇으로 다른 이들과 공감(共感)하는 것이다. 31일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하얀 국화와 다양한 색깔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이곳은 지난 28일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을 하던 외주업체 직원 김모씨가 목숨을 잃은 승강장이다. 이동희 기자

“비정규직의 설움이 남 일 같지 않아요. 최저임금도 못 받고 편의점 알바를 한 적이 있거든요.”

31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대합실에서 박태훈(25·대학 4학년)씨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포스트잇으로 도배된 벽 한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난 28일 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다 목숨을 잃은 외주업체 직원 김모(19)씨를 추모하는 포스트잇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갔다.

한참이 지나서 포스트잇에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눌러썼다. 잠시 볼펜을 뗐다가 ‘고인 또래의 한 학생’이라고 덧붙였다. 박씨는 “추모의 뜻을 마음에만 담아두는 것보다 포스트잇 한 장이라도 붙여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었다”며 대합실을 떠났다.

공감의 연결효과

접착식 메모지인 포스트잇이 새로운 추모 도구로 등장했다. 지난 17일 발생한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 이후 포스트잇을 붙여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당시 강남역 10번 출구는 1만2000개가 넘는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포스트잇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감의 연결효과’로 봤다. 김 교수는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담아 소통하고, 다른 사람들이 공감해주길 바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꽃다운 나이의 여성, 스무 번째 생일을 앞둔 비정규직 근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누구나 그들처럼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공감이 포스트잇을 남기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조모(46)씨도 이날 국화 한 다발을 들고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았다. 조씨는 “특성화고교에 다니는 아들이 열여덟 살이다. 내 아들 일인 것처럼 마음이 아파 집에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어 “스물두 살인 딸이 생각나 강남역도 갔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포스트잇을 못 붙였다. 오늘은 집에서 준비해 왔다”고 말했다. 조씨는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고개만 떨궈지는구나’로 시작하는 227자가 적힌 노란색 포스트잇을 꽃다발과 함께 놓았다.

‘가로×세로 76㎜’의 추모공간

왜 포스트잇일까. 전문가들은 쉽게 뗐다 붙일 수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잇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닮았다고 진단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포스트잇은 자유롭고 유연함을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SNS와 닮았다”고 했다. 젊은세대가 슬픔과 아픔을 공유하는 수단으로 SNS에 글이나 사진을 남기고 공유하듯 비슷한 성격을 지닌 포스트잇이 추모에 활용된다는 설명이다.

포스트잇은 현장성이 더해진 SNS라는 분석도 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포스트잇은 SNS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사회문제에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SNS가 발달하면서 감정을 묵혀두지 않고 쉽게 표현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고, 이런 문화가 포스트잇과 연결되면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추모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서울메트로는 이번 사고와 관련, 책임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이날 오후 8시쯤 발표했다. 서울메트로는 사과문에서 “우리 아들, 동생 같은 19세 청년을 잃게 한 것은 서울메트로 직원 모두의 책임이며 깊이 반성하고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고인의 잘못이 아닌 관리와 시스템의 문제가 사고의 주 원인”이라고 밝혔다.

신훈 김재중 오주환 허경구 기자

zorb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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