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전설의 포수 제이슨 베리텍(44)은 투수 팀 웨이크필드(50)의 공을 처음 받고 배터리로 나서길 주저했다. 도무지 어디로 들어올지 예측할 수 없는 웨이크필드의 공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공은 타석 바로 앞에서 옆으로 꺾이거나 뚝 떨어졌다. 그렇게 갑자기 궤적을 바꾼 공이 포수의 뒤로 빠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베리텍은 포구를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젓가락으로 파리를 잡는 것 같아요.”
거의 매년 130경기 넘게 출전해 두 자릿수 홈런을 치고 두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보스턴의 주전 포수 베리텍은 웨이크필드가 등판할 때만큼은 불만 없이 벤치로 돌아갔다. 웨이크필드와 호흡을 맞춘 전담 포수 덕 미라벨리(46)에게 출전을 양보했다.
주전 포수마저 당황할 만큼 제구의 일관성이 없는 공. 그만큼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아 헛스윙을 유도하기 좋은 공. 웨이크필드의 공은 너클볼(Knuckleball)이었다. 너클볼은 패스트볼보다 느리지만 마운드부터 타석까지 춤추는 것처럼 날아가는 구종이다. 흔히 말하는 ‘마구(魔球)’ 중 하나다.
마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학이다. 투수는 손톱으로 표면을 찌르듯 손가락을 많이 굽혀 공을 쥐고 던진다. 이렇게 던진 공은 회전수가 줄어 공기의 저항을 받는다. 공은 타석 바로 앞에서 궤적을 바꾼다. 그렇게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한다. 바람과 기압에 민감하다. 경기장의 고도에 따라 위력은 달라진다. 손가락관절(Knuckle)을 활용한 그립 방법 때문에 너클볼이란 이름이 붙었다.
너클볼을 수년간 연마해 경기당 5개 안팎으로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있다. 롯데 자이언츠 투수였던 크리스 옥스프링(39·호주)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투구의 70% 이상을 이 공으로 소화하는 진짜 ‘너클볼러’는 많지 않다. 메이저리그의 현역 투수 중에선 2명뿐이다. 보스턴의 스티븐 라이트(32),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R.A 디키(42)가 바로 그들이다.
디키는 뉴욕 메츠 소속이었던 2012년 사이영상을 수상한 대표적인 너클볼러다. 하지만 올 시즌부터 침체기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2승6패 평균자책점 4.64로 사상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반면 라이트의 상황은 다르다. 보스턴에 입단한 2013년 29세의 늦은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입문한 그는 올 시즌부터 야구인생의 클라이맥스로 들어섰다. 개막 두 달 만에 5승4패 평균자책점 2.45를 수확했다. 이 성적만으로 메이저리그 개인 통산 전적(12승9패)의 절반 가까이를 달성했다.
그도 처음부터 너클볼러는 아니었다. 시속 90마일(145㎞)대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평범한 투수였다. 하지만 2006년 신인 드래프트 2차 지명으로 입단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그가 주전으로 설 마운드는 없었다. 킹스턴 인디언스 등 마이너리그 팀을 전전하며 20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평범하게 끝날 것 같았던 야구인생은 클리블랜드의 의사결정에 따라 너클볼을 연마한 2011년부터 대반전을 시작했다.
2년 뒤 보스턴으로 이적해 백업 요원으로 메이저리그에 입문한 그는 올 시즌부터 주전으로 올라섰다. 5년 동안 연마한 너클볼은 예상 밖으로 위력적이었다. 경기마다 6명 안팎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평균 시속 72마일(115㎞)의 느린 구속은 어깨의 부담을 줄여 완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라이트는 31일(한국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캠든야드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시즌 세 번째 완투승을 달성했다. 9이닝을 4피안타 2실점으로 막고 7대 2 승리를 이끌었다. 그가 던진 공은 122개. 볼티모어 타자들은 그의 너클볼을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볼티모어의 2번 타자로 선발 출전한 김현수(28)도 3타수 무안타로 돌아섰다.
김현수가 라이트의 너클볼에 진땀을 빼는 동안 또 다른 코리안 메이저리거 이대호(34·시애틀 매리너스)는 시즌 7호 홈런을 때렸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홈경기에서 6-2로 앞선 8회말 1사 1, 3루 때 127m를 날아 좌중간 담장을 넘긴 쓰리런 아치를 그렸다. 시애틀은 9대 3으로 승리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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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01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