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에서 부산 도회지로 옮겨온 건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다. 당시에는 시험을 보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부산에서 입학시험을 본다고 하니 시골 사람들은 “춘희가 되겄나”라며 한마디씩 했다. 보란 듯이 400점 만점을 받아 공동 수석으로 입학했다.
나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공부 음악 미술 체육 등 가리는 게 없었다. 특히 웅변에 소질이 있었다. 중·고교, 부산대 재학 중에도 전국 웅변대회에 나가 상을 많이 받았다. 대학생 때는 국회의원 찬조연설도 많이 했다. 그때부터 어른들은 “춘희는 말 잘하니까 나중에 정치해라. 제2의 박순천이 돼라”고 말씀하셨다.
한때는 문학소녀의 꿈도 키웠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를 가르쳤던 윤 선생님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감수성들을 깨어나게 하신 분이다. 선생님은 ‘삼봉이는 잘한다’라는 수필을 읽게 하시고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글을 써보라고 하셨다. 나는 삼봉이처럼 개구쟁이였던 막내 동생에 대해 글을 썼다. 선생님은 “춘희 니가 글을 잘 쓴다”며 다른 학생들도 볼 수 있게 교실 벽에 붙여 놓으셨다.
윤 선생님이 전근을 가신 뒤 오신 선생님은 사뭇 달랐다.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쓴 나의 일기장을 외면하고 내 것을 가져다 베낀 친구의 것에 더 후한 점수를 줬다. 발표를 할 때도 나는 항상 뒷전이었다. 발표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시골뜨기라고 샘(선생님)이 차별한다’며 속상한 마음을 어머니에게 전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이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깡촌 시골 초등학교에선 더한 일도 있었다. 한 번은 선생님이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중간고사를 볼 때 결석하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반평균’을 그 친구가 깎는다는 게 이유였다. 성적을 놓고 반과 반의 경쟁이 심하다 보니 선생님들도 교육의 정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에 그 친구가 할머니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부럽고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친구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날 밤 어머니는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 일일 달력에 정성껏 싸주시며 친구랑 실컷 놀다오라고 하셨다.
돈 없고 가난했던 나는, 또 내 친구는 왜 차별을 받아야 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이 땅에는 약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속상한 마음을 다 표출하고 살지는 않았다. 만약 선생님께 차별 받는 것 때문에 화를 내고 대들었으면 어땠을까. 학교를 다니는 게 싫었을 테고, 그만뒀을 지도 모른다. 당연히 좋아하는 웅변도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천사를 붙여주신다. 나는 어머니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통해 위로 받았고, 친구는 누룽지를 나눠 먹는 동무에 기대어 속상한 마음을 다스렸을 것이다. 우리 모두 더우면 걷어차고 추우면 끌어다 덮을 수 있는 이불 같은 친구요, 부모가 됐으면 한다.
하나님께 감사할 게 참 많지만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이것이다. 긍정의 마인드를 심어주신 것.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화내지 않는 성격이 먼저였는지, 긍정적 마인드가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화를 내본지 참 오래됐다. 그래서 화내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하나님은 지금의 박춘희를 만들기 위해 그 시절부터 그렇게 나를 다듬으신 것 같다. 화를 참아내는 법까지도 말이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역경의 열매] 박춘희 <3> 속상할 때마다 위로의 천사를 붙여주신 하나님
입력 2016-05-31 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