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목포시 죽교동 유달산 아랫동네에 공생원이란 아동복지시설이 있다. 일제 치하인 1928년 윤치호 전도사가 추위에 떨고 있는 고아 7명을 발견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공생원의 역사는 시작된다. 크리스천인 일본인 여교사 다우치 지즈코는 자원봉사자로 공생원을 드나들면서 1938년 윤 전도사와 결혼하고 윤학자란 한국 이름을 얻게 된다. 한국전쟁 중 윤 전도사가 실종되지만 윤학자는 한국에 계속 남아 3000명에 달하는 고아를 길러낸다. 66년 윤학자가 별세했을 때 목포 시민들은 시민장으로 그를 떠나보낸다. 한·일 양국은 95년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공동 제작했다.
목포의 한적한 해안도로변 공생원 앞으로 하루에도 수천대의 차량이 지나가지만 차량에서 내리지 않는 이에겐 공생원은 보이지 않는다. 국적을 넘어선 일본 여인의 한국 고아를 향한 무한사랑은 목포 도보여행자에게만 보인다. 목포는 특이하게도 1897년 고종의 칙령에 따라 자주적으로 개항한 항구다. ‘윤치호 윤학자 기념관’을 비롯해 유달산, 조선내화, 성옥기념관, 옛 일본영사관 등 목포의 영욕을 함께한 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유달산 기슭 다순구미마을 담벼락에는 1967년 DJ의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벽보가 시간이 멈춘 듯 찾아오는 이들을 기다린다.
이처럼 도심지 도보여행은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국내 특정 지역을 섭렵하는 도보여행은 빠듯한 일정과 비용에 쫓기는 해외여행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잔잔한 감동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도시 문화와 역사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북촌, 서촌, 정동 등에서 불기 시작한 도심지 도보여행은 부산 대구 군산 목포로 그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길을 재촉해 전남 영암으로 가보자. 목포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의 영암 구림마을은 1500년이 넘는 역사를 품고 있다. 지금은 내륙지방인 영암의 상대포는 삼국시대에는 지역 특산품인 도기를 매개로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상실크로드의 주요 포구였다. 왕인박사가 상대포를 통해 일본으로 갔고, 최치원도 이 포구에서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영암 구림마을에는 왕인박사 유적지가 있다. 또 이 마을 죽림정에는 이순신 장군의 자취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로 진영을 옮기면서 이곳이 고향인 현덕승 사헌부 지평에게 쓴 ‘무호남시무국가(無湖南是無國家)’란 편지 내용이 죽림정에 걸려 있다. 구림마을을 걷노라면 어느 새 시공을 초월한 자유인이 돼 있다.
도심지 도보여행(city walking tour)은 자연과 함께하는 트레킹(trekking)과 다르다. 흔히 둘레길로 표방되는 트레킹이 목적지가 없는 도보여행 또는 자연을 벗 삼아 바람처럼 떠나는 사색여행이라면 도심지 도보여행은 목적이 뚜렷한 인문여행이다. 역사도 있고, 문화도 있다. 도심지 도보여행은 또한 도시재생 사업과 연관이 크다. 관광객을 유치해 도시의 문화, 역사를 소개하면서 도시를 되살리는 경우다. 미국의 경우 LA재개발 계획으로 파괴될지도 모를 근대도시유산을 지키기 위해서 80년 LA유산보존도보여행을 처음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서울 이화벽화마을과 부산 초량 이바구길 사업이 도심지 도보여행을 도시재생사업과 연결한 대표적인 사례다.
오랜 시간을 걷는다는 점에서 도심지 도보여행은 또 다른 형태의 스포츠다.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해 목적지까지 완주하는 경기인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처럼 도심 유적지를 탐방하며 건강도 챙기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수많은 사업 가운데 부서 명칭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바로 도심지 도보여행이 아닐까 싶다.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
[돋을새김-서완석] 자 떠나자, 도심지 도보여행
입력 2016-05-30 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