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남 산청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이름에 대한 추억에 웃음부터 난다. 부모님은 아들이 태어나길 지극정성으로 빌었는데 딸이 태어나자 차일피일 출생신고를 미루셨다. 옆방에 세 들어 산 총각이 부모님을 대신해 출생신고를 했다. 이름도 ‘춘희’로 직접 지어서 말이다. 언니 이름이 ‘옥희’였으니 부르기 쉽게 ‘춘희’로 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네 이름은 옆방 ‘자범’이가 지어 그렇다”며 놀리곤 한다.
부모님은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 오일장 근처에서 살림집이 딸린 구멍가게를 하셨다. 작은 ‘점방(店房)’이었다. 어머니는 억척스러운 분이셨다. 가게 돌보는 것도 모자라 산에서 나무를 해오시고 메밀묵도 쑤어 파셨다. 아버지는 면서기로 일하셨지만 한량 같은 분이셨다. 친구들과 어울려 낚시하는 것을 좋아해 집안 살림에는 신경 쓰지 않으셨다. 그러다보니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자식들에게 화풀이를 하셨다.
어머니 대신 점방을 보다가 친구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딴 짓이라도 하면 혼쭐이 났다. 친구들은 “느 엄마 느∼무 무섭다”며 들로 산으로 함께 도망쳤다. ‘싼돌이’란 별명답게 하루 종일 싸돌아다녔다. 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 벌을 서고 회초리를 맞은 뒤에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맛있게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모범을 보여야하는 신앙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입히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교회 근처에 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 눈을 피해 나는 친구들을 따라 동네 교회에 나갔다. 성탄절 때 떡이나 과자를 먹고, 무용이나 연극을 하는 게 좋았다. 무엇이든 잘한다고 칭찬해주니 교회에 가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두 살 많은 오빠가 문제였다.
하루는 어머니 하얀 속치마를 머리에 두르고 종이 왕관을 쓴 채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동생의 무대를 재밌게 지켜본 오빠는 “춘희가 교회서 춤췄다”고 일렀다. 돈을 모아 헌금이라도 드린 날이면 “춘희가 하늘에 돈 던졌다”며 고자질했다. 어머니에게 엄청 혼났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면 ‘우리 어무이는 참 못 됐다’라며 서러워 울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누구보다 듬직한 분이셨다. 점방에서 5원에 열 알씩 과자를 팔았다. 아이들이 빈 병을 가져오면 어머니는 반 움큼씩 과자를 주셨다. 한 번은 텃밭에 계시느라 아이에게 돈만큼 과자를 가져가라고 하셨다. 나중에 보니 과자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고 여기저기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놈을 찾아내 따지겠다”고 우기는 내게 어머니는 “놔둬!”라고 말씀하셨다. 그 아이 엄마가 찾아와 미안하다고 할 때도 어머니는 “고마 됐어예∼”라고만 하셨다. 어머니는 이튿날 조용히 말씀하셨다. “춘희야, 입으로 먼저 사달을 내지 않으면 큰일도 작은 일이 된다.”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했던가. 나는 어머니의 강한 생활력을 물려받은 것 같다. 말 없고 무뚝뚝한 것까지도 말이다.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어머니는 이래라, 저래라 말씀이 없으셨다. “어무이∼. 와서 내랑 같이 좀 살자”고 했을 때도 이유를 묻지 않고 “알았다”고만 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지금까지 어머니는 나와 함께 살며 힘이 돼 주신다. 아예 새벽교회 옆에 살며 매일 교회에 나가신다. 찬양하고 기도하시면서 어머니는 교회에서 가장 많은 대화를 예수님과 나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역경의 열매] 박춘희 <2> “어릴 때 무엇이든 칭찬해주는 교회가 즐거워”
입력 2016-05-30 17:56 수정 2016-06-01 1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