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 피의자가 신학원을 다녔다고 하고, 신대원생이 위조수표로 성매매를 하고, 목사 아버지가 자녀를 살해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나 특정 신학교의 문제라고 덮어놓기엔 도를 한참 넘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 신앙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예언자적 영성의 부재라는 진단에 공감합니다.
예언서는 쉽게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목회자는 예언서 설교를 어려워하고 꺼려하고, 회중들도 예언서 듣기를 불편해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언서의 강력한 호소와 질타를 들어야 합니다.
아모스는 예루살렘에서 20㎞ 남짓 떨어진 작은 마을의 촌부였습니다. 양을 치고 뽕나무 잎을 땄고, 종교적인 훈련을 받은 적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를 특별하게 사용하셨습니다. BC 760년 즈음,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절입니다.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영토가 솔로몬 때만큼 확장됐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종교적 타락과 윤리적 부패상이 최악이었습니다.
아모스란 이름은 ‘짐을 지는 자’라는 뜻입니다. 남유다 출신인 그는 고향을 떠나 북이스라엘에서 예언자 역할을 했습니다. 아모스가 외칠 때 사람들은 불경하다, 사회 불안을 조장한다며 그의 말을 무시하고 거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질적 풍요, 군사적 안정, 종교적 열심을 믿고 미래를 낙관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자기 확신이 자기기만이라고 질타합니다. 특히 종교적 열심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드리는 제사 자체가 잘못됐으며 하나님은 듣지도 보지도 않으신다고 말합니다(암 5:21∼23). 지금 교회는 어떠합니까. 혹시 예배의 자리에서 범죄하고 교회에서 더 죄를 짓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정의와 공의입니다. 이는 곧 공동체 의식 혹은 사회 윤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의 문제는 진보나 보수가 아니라 하나님 성품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을 편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힘없는 자들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편애를 교회도 가져야 합니다. 얼마나 성숙한 교회인가는 교회가 가난하고 취약한 자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렸습니다. 매일 생활 속에서 정의와 공의를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참된 제사입니다.
이는 결코 예배보다 윤리적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 삶으로 증명되지 않는 예배는 허구이고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의식과 이웃사랑이 없는 예배자는 예배자가 아닙니다. 아모스는 정의를 저버린 예배는 죄악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려면 더 열심히 제사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짓밟는 현실을 고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는 일상의 자리가 결정합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 창조의 산물, 그리스도 보혈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체험할 때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안선홍 목사 (미국 애틀랜타 섬기는교회)
◇약력=△서울신학대학원 석사 △예일대 신학대학원 석사
[오늘의 설교] 사랑과 정의의 입맞춤
입력 2016-05-27 2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