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5년째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들은 매주 화요일 오전 11시면 이 집을 찾는다. 적을 때는 30명, 많을 때는 50명이 넘는다. 겉보기엔 여느 가정집과 다를 게 없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위치한 1층짜리 주택이다. 할머니들은 한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를 드린 뒤 점심을 먹는다.
할머니들은 젊은 시절 미군을 상대한 이른바 ‘기지촌 여성’이었다. 이들이 모이는 곳은 기지촌 할머니를 돌보는 단체인 ‘햇살사회복지회’(햇살회). 2002년 6월 ‘햇살센터’로 개원한 이곳은 2006년 사단법인이 되면서 지금의 명칭으로 이름을 바꿨다. 햇살회를 만들어 이끌어온 주인공은 우순덕(64·여) 대표다. 그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외로운 노년을 맞은 할머니들에게 둘도 없는 친구이자 자식과도 같다.
“그늘에서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햇살을”
최근 햇살회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거실 곳곳에 있는 성경과 찬송가였다. 거실은 할머니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장소. 우 대표는 거실로 들어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할머니들의 열악한 삶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햇살회 회원으로 등록된 할머니가 70여명 정도 됩니다. 대부분 가족이 없거나 연락이 끊긴 분들이에요.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든 삶을 살아가고 계시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빈소에 찾아가면 조문객이 저를 포함해 2∼3명밖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 감리교신학대 71학번인 우 대표는 가난한 형편 탓에 고학(苦學)으로 대학을 마쳤다. 학창 시절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할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평생 어려운 여성을 도우며 살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에서 간사 부총무 등의 직책을 맡아 일했다. 여선교회 일을 하면서도 세상의 음지에 놓인 사람을 보듬겠다는 결심을 잊은 적은 없었다. 기지촌 할머니를 위한 사역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건 2000년 여름이었다.
“경기도 의정부 동두천 평택 등지의 기지촌 할머니들이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분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준비과정을 거친 뒤 2002년 6월 팽성읍 한 지하방에서 창립예배를 드리면서 본격적으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단체명에 ‘햇살’이라는 단어를 넣은 건 세상의 음지에서 웅크린 채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햇살 같은 따뜻함을 선물하고 싶어서였다. 햇살회는 2002년 개원 이후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생필품을 지원하고 상담을 진행했으며, 할머니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주거공간 마련운동도 전개했다. 후원자들에게 3∼4개월 주기로 감사편지를 보낸다. 1년에 한 번씩 소식지도 발행한다.
“한국교회가 기지촌 할머니 품어야”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위안부 할머니’들은 1993년 제정된 특별법에 따라 소정의 생활안정지원금을 받는다. 하지만 기지촌 할머니는 그렇지 못하다. ‘자발적 성매매 아니었느냐‘는 식의 냉대와 멸시 탓에 이들을 보듬는 법이나 제도는 전무한 실정이다.
우 대표는 위안부 할머니처럼 기지촌 여성도 역사의 피해자라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가 과거 미군을 상대로 여성에게 성(性)을 팔도록 사실상 강요한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주장이었다.
“정부가 미군들을 상대로 여성들에게 ‘서비스’를 잘하도록 강요하고, 기지촌정화위원회까지 만들어 여성들의 성병을 검진했습니다. 이미 수많은 논문과 언론보도가 검증한 사실입니다. 기지촌 여성을 관리하고 (성매매를) 부추긴 만큼 정부는 할머니들에게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기지촌 여성’으로 청춘을 보낸 뒤 쓸쓸한 노후를 맞은 여성이 전국에 몇 명이나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우 대표는 “전국적으로 400∼500명 수준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어 “할머니 대다수는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다”면서 한국교회에 지원을 호소했다.
“할머니의 70∼80%가 기초생활수급권자입니다. 기초생활수급권자에게 나오는 정부 지원금으로는 다들 월세 내기도 빠듯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할머니들이 하나님의 햇살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후대의 역사가가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기록하겠습니까.”(후원 문의 031-618-5535)
평택=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그늘 속에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한줌 햇살을…
입력 2016-05-29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