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져 가고 있다. 독거노인만이 아니라 싱글족이 많아졌다. 외로움이 심화 되어져 가는 사회를 살고 있다. 외로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슈가 되었다. 외로움에서 오는 후유증은 다양하고 심각하다. 각종 약물중독, 알코올중독, 자살, 정신질환들, 충동적 살인, 가정 파탄, 심지어 교통사고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병든 사회, 불안이 깊어져 간다.
식을 줄 모르는 경쟁사회는 개인을 더 심각하게 고립시킨다. 혼자 지내는 법을 아무리 익힌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 문제다. 홀로 서기에 대한 심리학적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먹고 연습한다고 될 정도의 가벼운 주제는 아니다.
홀로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사랑의 대상 없이 산다는 것은 비극이다. 외로움의 끝에서 찾아오는 공허감이 깊어지면 우울하다. 성공은 했지만 성공의 끝에서 외로움에 떠는 리더들이 많다. 부러움을 사는 자리에 앉아있지만 외로움에 지쳐 잘못 선택한 결과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인생도 늘어나고 있다.
외로움은 치명적이다. 깊은 외로움은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다. 화려하게 보이는 스타들의 죽음에서 죽음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을 짐작하게 한다. 요즘은 가족관계 안에서도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신적 별거 상태들이 많다. 한 지붕 아래 사는 것만으로는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함께 있어 더 외로워진 삶은 더욱 치명적이다. 가족 간에도 선명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소통은 고사하고 감정적 교감이 끊긴 삶은 서로를 끝없이 밀어낸다. 더 이상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피상적 ‘함께 함’이란 폭력적이 될 수 있다. 관계성의 문제가 몸살을 앓는 시대다. 소통은 고사하고 적대적인 관계들이 늘어나면서 삶의 질은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문명의 대가이거나 일명 ‘문명병’이라고도 한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본 최악의 질병은 외로움이라고 한 적이 있다.
외로움에 지쳐 어디론가에 빠져 들면 거기에는 각종 중독이 도사리고 있다. 중독은 외로움에 대한 빗나간 도피다. 외로움으로부터의 도피는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속박이다. 현대인들은 더 바빠졌다. 아니 자신이 스스로를 분주하게 만든다. 외로움에 대한 도피극이고 그 끝은 더 위험한 벼랑이다. 외로움을 위한 나만의 도피처는 딱 한곳 뿐이다. 바로 공동체다.
사람은 자신의 체온만으로 냉혹한 세상을 이길 온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누군가와 손을 맞잡을 때 그 터치에서 ‘나’를 자각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너로 인해 인식된다. 그것이 본래 인간의 삶이다. 나와 너와의 터치에서 삶의 의미가 생기고, 사랑의 꽃이 피고 희망이 돋아난다. 태어난 아기는 엄마의 손이 닿을 때 사랑을 느끼고 심장이 뛰고 성장이 시작된다. 눈과 눈이 마주치며 감각을 익히고 언어를 배워가면서 사람이 되어 간다.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가 삶이다.
공동체가 사라졌다. 함께 하는 삶이 매우 희소해졌다. 가족간의 연결고리도 매우 약해져 가고 있다. 어렵고 힘든 삶은 언제나 있었다. 앞으로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다양한 전망을 내어놓는다. 과연 무엇이 가장 힘든 것일까? 홀로 있는 삶이다. 위험을 홀로 맞는 것이 위기상황이다. 사람들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보다 ‘함께 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는 듯 하다. 차라리 홀로가 낫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관계는 두려움을 주는 것은 틀림없다. 아름다운 관계 안으로 들어가려면 난관이 많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나 홀로’보다 ‘함께 함’이 주는 유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눈다는 것은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다. 환상적인 관계란 없다. 갈등과 부조화의 벽을 치열하게 통과해야 한다. 나와 너의 연결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우정을 쌓아갈 때 비로소 활기 있는 공동체가 일어난다. 나만의 삶에서 빠져 나와 ‘나와 너’의 삶으로, 솔로가 아닌 오케스트라처럼 하모니 안으로 들어가는 공동체적 삶이 대안이다. 가족관계 안에서 답이 있다. 살가운 참된 우정이 답이다. 답은 가까이에 있다. 가장 원초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영혼 없는 상업적인 만남보다 따뜻한 공존만이 공허를 메우고 외로움을 이기는 길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 공을 들이는 것보다 더 귀중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규현<부산 수영로교회 목사>
[이규현 칼럼] ‘나와 그것’에서 ‘나와 너’로
입력 2016-05-27 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