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캔 그리피 시니어와 주니어 부자(父子)는 1990년대 초반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함께 선수생활을 했다. 그리고 1990년 8월 31일 한 경기에서 나란히 홈런을 때려내는 신기원을 이뤘다.
한국에서도 이런 모습을 꿈꾸는 선수가 있다. 바로 대학생 아들을 둔 40대의 ‘저니맨’ 투수 최영필(42·KIA 타이거즈)이다. 온갖 세상 풍파를 견뎌낸 노장은 나이를 거슬러 이제 팀의 핵심 불펜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경기에 나서겠다는 꿈을 위해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경희대를 졸업한 최영필은 1997년 현대 유니콘스에 1차 지명돼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정민태 임선동 위재영 정명원 등 호화 투수진으로 가득했던 현대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결국 2001년 트레이드로 한화 이글스에 둥지를 틀었다. 한화에서 그는 자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2005년 자신의 역대 최고 성적인 8승 8패 5세이브를 거뒀고, 그해 준플레이오프에선 최우수선수(MVP)에 오르는 기쁨도 맛봤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2008년에 팔꿈치 부상으로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은 뒤 하향세를 그렸다. 15년의 노력 끝에 2010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다. 그 해 21경기 1승 4패 평균자책점 7.45로 평범했던 36세의 노장을 받아주는 팀이 없었다. 결국 그는 FA 미아가 됐다.
이후 찬밥의 연속이었다. FA 계약을 맺지 못한 선수는 이듬해 경기에 뛸 수 없다는 규정에 은퇴를 강요당했다.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최영필은 쫓기다시피 해외로 떠났다. 2011년 1월 미국 트리플A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너무 열악했다. 월 급여 1500달러에 숙식을 모두 직접 해결해야 했기에 에이전트에게 멕시코리그를 소개받고 또다시 비행기를 탔다. 주소 하나만 손에 쥐고 혼자 떠났다. 환승을 해야하는 멕시코시티에선 비행기가 고장나 4시간 넘게 기내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고생 끝에 멕시코 칸쿤의 티그레스라는 팀에 들어갔다. 그래도 월봉 8000달러에 세금도 없어서 그나마 좋았다. 티그레스 유니폼을 입고 곧바로 세 경기에 나가 11이닝 동안 3실점 9삼진으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한화 시절 동료였던 더그 클락과 서로 믿고 의지하며 야구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런데 단 세 경기만 뛰고 다시 짐을 쌌다. 구단 측에서 계약 조건으로 내세운 ‘최고구속 90마일(144㎞)’ 제약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공을 세게 던져도 스피드건에는 89마일(141㎞)이 찍혔다.
다시 일본 시코쿠 큐스 아일랜드 리그의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즈 입단 테스트를 받고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취업비자가 발목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일본 독립리그를 노크했다. 한국 선수가 많이 뛰는 서울 해치스였다. 숙식은 해결해줬지만 급여가 없던 그 곳에서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우여곡절을 거친 최영필은 결국 2012년 SK 와이번스의 부름을 받아 한국 무대에 복귀했다. 그 해 2승 1패 5홀드를 거두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알토란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문제였다. 팀이 2013시즌이 끝난 뒤 은퇴와 함께 코치직을 제의했지만 선수생활을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강해 이를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맞아준 곳은 KIA였다. 최영필은 2014년 KIA와 신고선수 계약을 했다. KIA에서 그는 전성기 못지 않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는 올 시즌 KIA 불펜의 핵이다. 시즌 초반이지만 14경기에 나와 2패 2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3.07을 기록 중이다. 선발 투수에 구멍이 생기면 그가 임시 선발로 나오기도 한다. 지난 15일 한화전에는 2095일 만에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다.
이제 그는 역사가 되고 있다. 4월 9일 kt 위즈전에는 역대 최고령 세이브를 달성했고, 4월 24일에는 최고령 500경기 출장 기록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의 열정은 아들과 함께 야구를 하겠다는 소망에서 나온다. 최영필의 아들 종현(20)군은 경희대 투수다. 이제 3년만 더 선수생활을 하면 그 꿈이 이뤄진다. 최영필은 “종현이 앞에서 창피한 모습 보여주기 싫었고 이겨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나를 채찍질했다”며 “언젠가 아들과 함께 프로에서 뛰는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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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세 저니맨 투수 최영필의 불꽃같은 삶… ‘한국판 캔 그리피 父子’ 꿈
입력 2016-05-26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