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의 꽃씨 칼럼] 교회 생태계부터 복원하자

입력 2016-05-25 21:09

과거에는 교회성장학자들이 사회·과학적 원리를 적용해서 개교회 부흥운동에 집중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 생태계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면서 개교회 부흥운동보다 네트워크 사역과 네트워크 교회에 관심을 갖는다. 생태계는 일반사회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환경단체들이 왜 생태계 관리와 복원을 위해 애쓰는가. 세계 각국 정상들이 왜 기후변화협약까지 하며 자연 생태계 복원을 위해 목매고 있는가. 환경·생태계가 파괴되면 우리의 생존이 위협 받고 생명 사회가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생태계가 급속하게 깨져가고 있다. 왜 그런가. 첫째, 교회 내부의 문제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을 이루는 진원이 됐지만 우리도 모르게 성장주의, 물량주의에 편승해 버렸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과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내부 파워게임이나 기득권 싸움을 하게 됐다. 바로 그런 갈등과 충돌, 분열하는 모습이 세상에 비춰지면서 사회로부터 비난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비판이고 우리가 먼저 빌미를 준 것도 사실이다.

둘째, 안티 크리스천의 의도적 공격 때문이다. 네오마르크시즘이 대중화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한국교회로 보면 그 기점은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이었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에 구호단을 보낸 교회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 당연히 할 일, 오히려 칭찬 받을 일을 한 것이다. 선교사들이 숭고한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병원을 짓고 학교를 세우며 인도적인 구호활동을 펼친 것처럼.

문제는 피랍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가 대처를 잘못한 것이다. 그 사건 전까지만 해도 안티세력들은 한국교회를 부분적으로만 공격해왔다. 그런데 그 사건이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떼거리로 달려들어 온갖 조롱과 비난을 쏟기 시작했다. 심지어 안티세력은 피랍된 사람들이 이슬람 사원에 가서 알라를 저주하고 모독했다고 사진까지 조작·합성해 탈레반 측에 인터넷으로 보냈다.

이때 한국교회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먼저 파송했던 교회가 적극 나서 언론 앞에 사과와 해명을 했어야 했다. 도피하고 숨는다고 능사가 아니지 않는가. 더구나 한국교회를 지도하는 그룹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잊힐 것이라 생각하고 무대응, 혹은 임시방편으로 소극적 대처를 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러나 잊히기는커녕, 오히려 그때부터 ‘개독교’ ‘똥경’ ‘먹사’ 등 교회를 향한 온갖 악의적인 조롱과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 나눠지고 끊임없이 치킨게임을 했다. 한국교회는 눈앞의 현상이나 교권이라는 파도만 보았지, 시대의 흐름과 트렌드라는 바람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반기독교 정서와 세력의 공격이 밀려오고 이단이 저렇게 판을 치는데도 거의 속수무책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한국교회가 여전히 개교회주의 사상에 안주하고 매몰돼 있기 때문이다. 공교회성과 네트워크 교회론에 대한 의식이 부족한 것이다. 둘째, 연합기관의 분열로 대표성을 상실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 생태계부터 복원해야 한다. 교회 생태계가 깨지면 미래교회도 깨진다. 개교회, 개교단주의로는 더 이상 안 된다. 생태계가 무너지면 작은 교회도 큰 교회도, 이웃교회도 내 교회도 없다. 그 실례를 영국교회가 보여줬지 않는가. 미국교회가 그 길을 가고 있지 않는가. 이제 개교회주의에 함몰된 잘못된 의식부터 고쳐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합기관이 속히 하나로 힘을 모아 대사회적 리더십을 행사하고 미래전략연구소, 싱크탱크 등을 설립해 대언론 사역을 수행하며 반기독교 정서와 세력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

지금은 개교회 성장보다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게 급선무다. 그러므로 한기총과 한교연이 무조건 하나 돼야 한다. 아니 속히 하나 돼야 한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한다면 모든 핑계나 구실을 내려놓자. 하나님의 영광과 한국교회의 공익을 먼저 생각하자. 그런 마인드로 교회 생태계부터 복원하자. 생태계가 복원돼야 미래교회가 존재할 수 있기에 말이다.

소강석 (새에덴교회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