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최석운] 내 영혼의 선생님

입력 2016-05-24 17:50

며칠 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아침. 대로변에서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 담겨 있는 분홍 장미를 샀다. 작업실 마당의 한쪽 귀퉁이에 두니 매일 아침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각양각색의 꽃들이 지천으로 늘어 한꺼번에 춤을 추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기후 온난화로 꽃들의 개화 시기가 뒤죽박죽 바뀐 것 같다. 특히 많은 꽃들로 온 세상이 예쁘게 물드는 오월은 가족과 은혜를 입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달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있다. 중학교 다닐 무렵 물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물리라는 과목에서 배운 게 무엇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짧은 곱슬머리에 외모가 반듯하고 미성의 목소리를 가진, 그리 크지 않은 신장에 팔뚝에 파란 실핏줄이 드러난 선생님은 눈앞에 있는 등신대의 사진을 들여다보듯 선명하다.

선생님은 항상 교과서는 물론 어떤 물건도 없이 교실에 들어오셨고 의례적인 인사도 생략한 채 칠판 앞으로 다가가 그날의 수업 내용을 묵묵히 써내려갔다. 칠판 가득 필기가 끝나면 뒷짐을 진 채로 푸른 하늘이 보이는 창가로 가서 혼자 밖을 내려다보셨다. 우리는 그런 수업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고 동그란 눈으로 칠판과 노트를 오가며 칠판의 글씨들을 옮겨 적기 바빴다.

창밖을 내다보는 선생님의 등은 어린 나의 눈에도 깊은 여운을 안겨주었다. 학생들이 필기가 끝나는 시간까지 한동안 그러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수업과는 다르게 선생님은 영어 문장들을 써내려갔다. 우리말로는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로 시작하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민요 ‘클레멘타인’ 영문 가사였다. 낯설고 어리둥절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선생님의 선창에 한 구절씩 따라 불렀고 수업시간이 끝나는 때까지 노래는 반복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나는 입속에서 그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있다. 언제 어디서나 그 노랫소리만 들으면 그때 물리 시간에 노래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이 생각난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간, 물리 수업을 받아야 할 때에 공부 너머의 삶과 낭만을 느끼게 해 준 인상적이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비슷한 시기의 국어 선생님은 수업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과제로 내준 일기를 검사하는 게 일이었다. ‘왜 중학생이나 된 우리의 개인 일기장을 훔쳐보려고 하십니까?’라고 선생님께 항의를 한 학생이 있을 리 없었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혼나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평소 관심이 낮은 과목의 학업에 집중도가 떨어지던 나는 지나간 날짜의 날씨가 맞는지 틀리는지 걱정하며 일기를 한꺼번에 며칠씩 몰아서 썼다. 선생님의 매서운 회초리를 모면하기만을 기도하며 두려움 속에 국어 시간을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60명이 넘는 학생들의 일기를 빠른 속도로 예리하게 검사하던 선생님이 나의 노트를 들고 교탁 쪽으로 가서 내가 쓴 일기장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이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다. 전날 다녀온 소풍에서 가게에 놓인 장난감을 하나밖에 못 사서 두 명의 동생에게 다 나눠줄 수 없었던 아쉬운 마음을 평소보다 장황하게 작성한 일기였다. 선생님의 과분한 칭찬으로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부끄럽고 민망하기도 했으나 넘치는 기쁨의 흔적은 아직 행복한 흉터처럼 내 내면에 남아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그때 국어 선생님이 해 주신 칭찬으로 잉크통을 채우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세상의 슬픔과 기쁨, 이웃 그리고 과거, 미래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을 잃지 않는 것은 물리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노래 덕분이리라.

최석운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