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이 남긴 과제] 뿌리 깊은 성차별… 여성 폭력·비하에 둔감

입력 2016-05-24 04:11
서울 서초구 직원들이 23일 서울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어 있던 추모 쪽지를 청사 로비로 옮기고 있다. 서울시는 추모 쪽지를 서초구로부터 넘겨받아 시청 지하 시민청에 마련한 추모공간에서 24일부터 전시한다. 윤성호 기자

2014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대학도시 아일라비스타에서 젊은 여성을 포함해 6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엘리엇 로저(당시 22세). 그는 범행 전 유튜브에 “여자들은 나를 거부했다. 스물두 살인데 여자와 키스해 본 적도 없다. 금발의 여대생들을 죽이고 길거리 모든 사람을 죽이겠다”는 동영상을 올렸다.

로저의 범행과 동영상이 알려진 뒤 여성들은 트위터에 ‘예스 올 위민(Yesallwomen)’이란 해시태그를 붙인 글들을 올렸다. 여성들은 일상생활에서 본인이 겪은 차별과 학대 등의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 표현이 사용된 지 나흘 만에 이 해시태그를 단 글이 120만건 올라왔다.

지난 17일 벌어진 ‘강남 살인’ 사건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파장이 커졌다. 여성을 범행 표적으로 특정했다는 점, 여성혐오(여혐)가 범행동기로 알려졌다는 점에서 한국판 ‘엘리엇 로저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사건의 폭발력에는 ‘여혐’ 논란이 촉발된 사회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경찰은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을 조현병 환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으로 결론 내렸지만, 논쟁은 더 뜨거워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구조적 차별’에 주목한다.

◇일상의 불안·공포=여성들은 이번 사건을 한 사람이 희생당한 사건이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로 받아들인다. 강남역 등지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글과 함께 자신이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느꼈던 차별과 불편한 시선, 불안감 등을 표출하는 목소리가 흘러넘쳤다. 지난 20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서울 신촌에서 개최한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선 여혐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회사원 이모(30·여)씨는 23일 “데이트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되는 사건들이 빈발하고, 방송과 광고들은 여성을 남성에게 의존하는 ‘된장녀’로 묘사하고 있다”며 “공공연한 여성 비하 행태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건이 일어난 후 공용화장실 개선 등이 안전대책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차별적 구조 개선을 위한 노력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여성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성차별적 구조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여성들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여성비하 발언 등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며 “정부는 사회구조적인 차별문화를 바꾸려는 노력을, 국민은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혐오 발언·범죄에 관대한 사회=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발언, 혐오범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이윤호 교수는 “우리나라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민족이다 보니 미국처럼 혐오발언이나 혐오범죄에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며 “이번 사건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혐오의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증오나 혐오 의도가 없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겨냥한 차별적 인식이 만연했다는 지적이다.

인종차별 등을 심각하게 경험한 선진국의 경우 혐오범죄를 막기 위한 법을 마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독일은 형법 130조에서 ‘국민 일부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거나 모욕 및 악의적 명예훼손을 통해 인권을 침해할 경우 최소 3개월에서 최대 5년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은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한 흑인 살해와 동성애혐오주의자의 살인사건을 계기로 2009년 ‘혐오범죄예방법(Hate crimes prevention act)’을 만들었다.

일각에선 한국도 ‘증오범죄가중처벌법’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은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서 나오는 끔찍한 범죄는 가중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라며 “제도화 방안을 20대 국회에서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반면 법 제정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증오범죄가중처벌법 도입은 국가와 공동체가 모든 차별과 적대를 몰아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면서도 “그 자체로만은 직접적 범죄예방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은애 기자 limitle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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