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패야 한다.’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 이후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축복받지 못하는 일이었다.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의 모진 시집살이를 견뎌내야 했던 우리네 어머니들은 딸을 낳으면 ‘대를 잇지 못하는 불효 며느리’란 시어머니의 지청구도 듣기 싫었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전철을 밟을까봐 눈물부터 쏟아냈다.
‘잘난 아들은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아들만 둘이면 木메달’ ‘아들 둘 둔 엄마는 객사’…. 요즘은 이런 말들이 유행할 정도로 남아선호 사상은 퇴색된 듯하다. 금녀(禁女)의 벽도 하나둘씩 무너지고 알파걸들의 활약으로 남성들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란 특수성이 더 많이 작용했겠지만 어찌 됐든 여성 대통령까지 배출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겉으로 보면 양성평등 국가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에 여전히 독버섯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불편한 시선은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여전히 버거운 일임을 느끼게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딸들은 성폭력 대상이 되지 않을까 불안 속에 살아가야 한다. 자고 나면 터져 나오는 끔찍한 성폭력 사건은 어느 누구도, 심지어 학교 안도 안전지대가 아님을 각인시켜 주고 있다. 성폭력은 2014년 10만명당 58.2명으로 10년 전보다 2.5배 늘었다. 범죄 불안을 느끼는 여성은 2010년 67.9%에서 2014년 70.6%로 해마다 증가 추세다. 대학이나 직장에선 슈퍼갑인 교수나 상사의 성추행, 성희롱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날로 잔혹해지는 데이트폭력이나 매 맞는 아내는 아직까지 물리적 힘에서 우위인 남성에 의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매 맞는 남편도 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비율이 69.9%(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가정폭력 행위자 상담 통계’, 2014년 기준)로 다수다.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여성들에게 운전이 금지된 국가도 아닌데 여성들은 도로 위에서 폭력을 당하기 일쑤다. ‘김여사’ 운전을 하거나 끼어들기라도 했다가는 난폭한 남성 운전자들의 보복 운전이나 험악한 욕설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한다. 직장 내에선 ‘높은 유리천장’ 때문에 좌절한다. 지난 3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 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25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중 꼴찌를 기록했다.
최근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살인 사건은 경찰이 결론 내린 대로 정신병자의 묻지마 범죄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 사회에 관행처럼 굳어진 여성 차별과 여성 비하 의식이 투영된 듯해 불편하다.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한 장소에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 일간베스트저장소 노무현 외 일동’이라고 조롱하는 조화가 보내졌다고 한다. 정신질환자의 피해망상에 의한 우발적 행동이라 할지라도 ‘여자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죽어간 20대 여성 추모 분위기가 일고 있는 가운데 이런 식의 남녀 편가르기로 몰아가는 몰지각한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다.
정부와 정치권은 공중화장실의 경우 남녀 화장실을 분리하도록 하는 등 대책을 마련한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때도 그랬다. 등굣길 이웃 아저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통영 어린이 성폭행 사건, 나주 7세 여아 성폭행 사건, 제주 올레길 걷던 여성이 성폭행 당한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숱한 대책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다음 생엔 남자로 태어나길 기원하는 수밖에. 이명희 디지털뉴스센터장 mheel@kmib.co.kr
[돋을새김-이명희]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입력 2016-05-23 1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