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 지 꽤 오래됐다. 이른바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디지털 리터러시’, 즉 프로그램 언어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 미래사회에서 필수적이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동안 프로그래밍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다양한 학습법과 소프트웨어가 제시됐지만 널리 확산되지 못했다. 프로그래밍 교육 과정이 어려운 데다 학생들도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글로벌 프로그래밍 교육계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놀이를 통해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마인크래프트’라는 게임이 확산되고 있는 덕분이다. 마인크래프트가 미국과 호주 등 교육현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를 들여다봤다.
#1 회사원 김모(37)씨는 지난 16일 여섯 살배기 딸을 서울 동작구의 한 이비인후과에 데리고 갔다. 대기실에는 환절기를 맞아 또래 아이들이 넘쳐났다. 딸과 함께 순서를 기다리는 김씨의 귀에 아이들이 구석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크리퍼’ ‘슬라임블록’ 등 단어를 들먹이는 게 들렸다. 순간 딸을 포함해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금방 옹기종기 모여든 아이들은 화면을 보며 토론을 시작했다.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은 아이들이 못 알아듣는 용어를 써가며 진지한 논쟁을 벌이는 모습에 김씨는 할 말을 잃었다.
#2 지난달 27일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의 계정에 영상 하나를 올렸다. 화면에는 마치 1980∼90년대 컴퓨터 화면을 연상케 하는, 도트 모양의 투박한 ‘네모’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역사상 테트리스와 위(Wii) 스포츠에 이어 3번째로 많이 팔린 게임 ‘마인크래프트’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버전이었다. 12만4000명이 넘는 이들이 저커버그의 영상에 ‘좋아요’를 누르며 호응했다.
◇글로벌 ‘마인크래프트 제너레이션’ 생긴다=광산에서 광물을 캐고, 농사를 짓는다. 수확물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또 세계 곳곳을 탐험한다. 단순히 누군가 만들어놓은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원하는 시스템을 아이디어를 활용해 구축해낸다.
2009년 출시된 마인크래프트 사용자는 현재 등록된 사용인구만 전 세계적으로 1억명이 넘는다. 전 세계 인터넷 사용인구가 30억명인 걸 따져보면 이들 가운데 최소 서른 명 중 한 명은 마인크래프트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마인크래프트는 국내에서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프리카TV 등 인터넷 방송이 중심이다. 마인크래프트 게임 방송을 하는 BJ ‘양띵’은 초통령(초등학생들의 대통령)으로 불리며 실시간 방문자 수 5만6000명을 기록,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슈팅이나 롤플레잉 게임이 주류인 한국 게임시장이지만 마인크래프트는 이처럼 10, 20대 초반 세대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메이저 게임으로 자리매김했다.
모바일 시장에서도 마인크래프트의 인기는 대단하다. 국내 모바일 앱 랭킹 서비스인 와이즈앱의 지난달 순위에 따르면 마인크래프트는 197만명이 이용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게임 중 1위를 차지했다. 특히 10대 사용자 수가 145만명으로 2위 ‘모두의 마블’(102만명)과 비교해 압도적이다.
저명한 정보기술(IT) 전문 언론인 클라이브 톰슨은 최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마인크래프트 세대(Minecraft Generation)’를 집중 조명했다. 마인크래프트를 통해 프로그래밍 기법을 체화한 아이들이 미래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것이란 전망이다. 70, 80년대 개인용 컴퓨터가 처음 보급되던 당시 컴퓨터를 가지고 놀며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이 자라나 저커버그 같은 IT업계 리더가 된 것과 비견할 만하다.
마인크래프트는 2009년 처음 출시됐을 당시 성인 팬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에서 소위 ‘긱(Geek·주로 컴퓨터 등에 광적으로 몰두한 사람)’으로 불리는 이들이 주된 사용자였다. 그러다 2011년 말쯤 아동에게 게임이 시판되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으로 판매량이 증가했다. 현재 미국에서 27달러(약 3만2000원)인 이 게임은 하루 1만개가 팔려나간다. 세계적으로 평균 플레이 연령은 28∼29세이며 여성이 40%를 차지할 정도로 고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전에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게임은 많았다. 그러나 마인크래프트 열풍은 이전까지와는 궤를 달리한다. 홀로 자원을 채취하고 세상을 마음대로 만들어가는 마인크래프트는 게임이라기보다 상상력대로 원하는 세상을 구성해 나갈 하나의 도구(tool)다. 별다른 훈련 없이도 아이들이 자연스레 기초적인 프로그래밍의 원리를 체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마인크래프트의 가장 큰 특징이다.
마인크래프트에는 애초 아무 설명도, 튜토리얼(교본)도 없다. 사용법을 익히는 가장 중요한 통로는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다. 최근 들어 일부 모드에 튜토리얼이 추가됐으나 기본적으로 사용자들은 ‘지식 공유’를 통해 스스로 사용법을 체득한다. 마인크래프트는 유튜브 검색어 가운데 ‘Music(음악)’에 이어 2순위를 차지할 정도로 사용자 간 활발한 교류가 일어나고 있다.
◇미국, 호주 ‘프로그래밍 시대’ 교과서로 삼아=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열한 살 꼬마 조던은 얼마 전 소설 ‘메이즈 러너’를 읽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거대한 미로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던 조던은 마인크래프트로 이를 실행에 옮겼다.
다양한 장애물을 만들었지만 소설 속처럼 예측 불가한 함정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고민하던 조던은 게임 안에 등장하는 동물 ‘무쉬룸’을 활용했다. 무작위로 움직이는 무쉬룸이 정해진 블록 중 하나를 밟으면 미로를 헤매던 사용자에게 함정이 발동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무쉬룸이 어떤 블록을 밟을지 알 수 없으니 저절로 원하던 함정이 만들어졌다. NYT는 조던이 발휘한 게 컴퓨터 엔지니어들에게 필수적인 문제해결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을 비롯해 호주 등에서는 이미 마인크래프트를 온라인 수업 진행 도구로 활용했다. 이웃 일본에서도 지난달 초등학생 60명을 대상으로 마인크래프트를 활용해 시험 교육을 했다. 국내에서도 충북 청주 원평초등학교 등에서 학생들이 마인크래프트 안에서 스스로 마을을 설계하는 등 시범 수업을 진행한 바 있다. 2014년 마이크로소프트(MS)가 원 제작사인 모장으로부터 25억 달러(약 2조900억원)에 마인크래프트를 사들인 데는 교육용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시중에는 ‘마인크래프트 에듀’라고 이름 붙여진 교육용 버전이 따로 나와 있다. 지난 18일 발표된 확장 버전에서는 학생들의 아이디와 학습 내용을 교사가 알아볼 수 있고, 완성된 작품을 촬영해 학습 과정을 공유할 수도 있다. 게임 환경을 교사가 설정하거나 별도 서버 없이 최고 30명이 협업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 기능도 추가됐다. 플레이어는 프로그램을 작성해 자신 대신 게임에 등장하는 생물 ‘터틀’이 자동으로 작업을 수행하도록 지시를 내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반복문, 조건문 등 프로그래밍에서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기법을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마인크래프트 열풍은 과거 유럽에서 시작됐던 블록 장난감 레고 열풍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하다. 특히 ‘창조적 장난감’의 대명사로 불렸던 레고와는 유사점이 많다. 간단한 블록으로 아이가 상상하는 새로운 세계를 무한정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다. NYT는 마인크래프트가 값비싸게 패키지화되면서 가능성을 잃어버린 레고와 비교해 훨씬 무궁무진한 미래를 지녔다고 평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월드 이슈] ‘네모 세상’ 마인크래프트를 아시나요
입력 2016-05-23 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