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고세욱] 전경련이 개성공단 도왔다면

입력 2016-05-22 17:51

서성길씨와 김현윤씨는 지난 2월 중순에 해고되거나 강제휴직 처리됐다. 누구보다 직장에서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던 이들은 지금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 서씨는 지난달 말부터 난생 처음 도배 일을 배웠다. 김씨는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서울 도심에서 1인 시위를 벌이다 1주일 전부터 봉제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이들은 개성공단 직원이었다. 2월 10일 정부가 개성공단 중단 조치를 취하고 이튿날 북한이 공단을 폐쇄한 지 100일이 지났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123곳 및 협력업체 직원 수만명의 삶은 지난 100일간 서씨, 김씨와 별 차이가 없었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라 했던가. 이들이 여권의 따스한 시선을 기대하지는 않았겠지만 야당들도 폐쇄 100일을 맞아 변변한 성명서 하나 발표하지 않는 현실에 좌절했을 것이다. 옥시 사태, 잇단 아동학대, 엽기적인 강남역 화장실 살인 등 연 이어 발생하는 핫이슈에 ‘개성공단 중단’은 속절없이 묻혀버렸다. 무엇보다 이들의 힘을 빠지게 만드는 것은 처지를 잘 아는 국내 기업과 경제단체들의 침묵이다. 물론 남북관계의 돌파구가 전혀 보이지 않고 국제적 대북제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운신의 폭이 넓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나라 기업인·근로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평소 개성공단의 의의와 경제 효과에 공감해 왔던 점을 생각하면 나 몰라라 하는 재계의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해 5월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북한을 아시아판 스위스로 만들자. 파주에 제2의 개성공단,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세우자’는 등의 아이디어를 내놨다. 당시 전경련 임원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경제교류가 활성화돼야 한다”며 대북지원 필요성을 역설했다. 개성공단 중단 조치 불과 한 달여 전인 올 1월 3일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의 체제불안을 전제로 한 기존의 시나리오 대신 남북 간 경제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배포는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 도발로 상황이 바뀐 것은 맞다. 하지만 애초에 경제단체들이 조건을 걸고 대북 교류 제안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많은 기업인들은 침체에 빠진 우리 경제에 북한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뒀다.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장은 지난해 10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수경제는 이미 포화상태여서 유라시아 대륙을 우리 내수시장으로 확대해야 한다”며 “제2·제3의 개성공단을 만들어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계는 이런 문제의식에도 정작 개성공단 사태가 터지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되면서 정권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경제단체의 맏형 격인 전경련은 최근 어버이연합에 뒷돈을 제공했다는 의혹으로 신뢰도가 추락했다. 한국경제의 미래를 설계하고 시장 개척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 경제단체의 본분이라면 전경련이 보수단체를 지원해야 했을까, 1년 전 품었던 대북경협 의지를 관철시켰어야 했을까. 개성공단 중단 100일을 기점으로 이제는 경제단체들이 정부에 남북경협 및 교류 정상화를 건의해야 한다. 청와대의 거부감이 예상된다 하더라도 한국경제 대계에 필요하다면 한 차례쯤의 직언은 필요하다. 친기업을 자임하는 현 정권에는 재계의 호소가 야당과 시민단체의 주장보다 유효할 것이다. 재계가 계속 방관한다면 서씨와 김씨가 100일간 흘린 눈물은 향후 한국경제의 고통이 될 수 있다. ‘전경련이 개성공단(남북경협)을 도왔다면’이라는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하다.

고세욱 산업부 차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