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요에서 도자기를 굽던 나는 1973년 한국민속촌이 세워질 무렵 이곳에 파견 와서 도자기 공방을 세우고 가마를 지었다. 그해 말엔 부산 동아대의 요청으로 학교에 가마를 묻어주고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다 갑자기 도암 선생 밑에서 독립해 나의 길을 걷게 된 일이 발생했다.
당시는 한국 도자기의 대부분이 일본사람들에게 팔려나갈 때였다. 많은 일본의 도자기 애호가들이 한국을 찾았다. 내가 몸담고 있던 고려도요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당시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를 저격했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23분의 일이다.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도자기를 사겠다는 일본인들도 사라졌다. 고려도요 생활이 어려워지자 도암 선생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도요를 나와 경기도 이천 수광리로 거처를 옮겼다. 우리 집은 마당이 좁아 가마를 세울 수가 없었다. 인근에 마당이 넓은 집에 살던 주민에게 “집을 바꾸자”고 했다. 외양간을 허물어 가마를 지었다. 내 입장에서는 일생의 꿈이었던 공방을 마련한 것이었지만 아내와 자녀들에겐 힘든 생활이었다. 새로 옮긴 집은 장롱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고 허름했다. 갑자기 많은 것이 불편해졌지만 아내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에 교회에 나가 나를 위해 기도해줬다. 형편은 어려웠지만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십일조도 꼬박꼬박 냈다. 아내는 나의 어머니를 닮았다.
얼마 뒤 다시 경기도 광주로 자리를 옮겼다. 광주는 조선시대 왕실 도자기를 생산한 사옹원 분원이 있던 곳이다. 아무래도 숭고한 역사가 있는 지역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도원요(陶元窯)’를 세웠다. 도원요는 최고의 도자기를 만드는 곳이라는 의미다.
처음엔 청자를 주로 빚었다. 한해 150점 정도 만들었다. 그러다 백자와 분청 위주로 만들었다. 나의 정서엔 분청이 더 잘 맞았다. 청자엔 불교적 의미가 많이 담겨 있는 반면 분청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서민적 인간미가 느껴진다. 분청에는 마치 따뜻한 인간의 체온이 흐르는 것 같다. 게다가 실용성이 있고 튼튼하며 조형미가 아름답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선물해주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선물은 기교가 아닌 본성적인 예술성을 달란트로 주신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가마와 함께 컸다. 흙을 조금 떼어주면 내 옆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았다. 어떤 측면에선 그때부터 이미 나의 문하생이었던 셈이다. 그 영향으로 아들은 현재 내게서 도자기 굽는 법을 전수받고 있다. 딸은 고려대에서 도자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생각했다. 도자기를 ‘창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재료인 흙과 불은 이미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흙과 불로 도자기를 빚어 새로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기장이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리=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역경의 열매] 박부원 <4> “최고의 도자기 만들겠다”… ‘도원요’ 설립해 독립
입력 2016-05-22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