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 기획] “나는 우연히 살아 남은 여성이다”… ‘강남 묻지마 살인’ 희생자 추모하며 절규

입력 2016-05-20 04:00
여성들이 19일 밤 서울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촛불을 들고 지난 17일 정신분열증을 앓는 30대 남성에게 살해당한 20대 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한 여성이 트위터에 촛불문화제를 제안하자 하나둘씩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돌아가며 “숨는 것보다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우리 사회가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길 바란다” 등의 발언을 했다. 추모행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뉴시스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는 ‘나는 샤를리다(Je suis Charlie)’와 ‘나는 테라스에 있다(Je suis en terrasse)’는 말이 들불처럼 번졌다. ‘샤를리’는 이슬람 풍자 만평을 이유로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를 당하자 표현의 자유 수호와 테러에 대한 저항의 뜻을 담은 말이었다. ‘테라스’는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2016년 5월 대한민국 서울 강남에서는 ‘나는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이다’는 말이 큰 울림을 만들고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는 ‘함성의 공간’ ‘추모의 공간’이 됐다. 사건이 알려진 지 이틀이 지난 19일에도 짤막한 글귀로 채워진 포스트잇 수백 개가 출구의 벽을 빼곡하게 메웠다. ‘나는 여자로서 싸울 것이다.’ ‘당신이었을 수도 있는 내가 감히 명복을 빌고 갑니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입니다.’

벽 아래에는 수백 송이 국화가 놓였다. 서초구청은 공간이 부족하자 4개의 하얀 보드판을 준비해 출구 옆에 설치했다. 가로 2m, 세로 1m 크기의 보드판도 불과 5시간여 만에 3분의 2가량 채워졌다. 글을 남긴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보드판 옆으로는 근조 화환 6개도 자리 잡았다.

추모 열기는 꽤 길어질 태세다. 이날 오후 8시쯤부터 시민 200여명이 모여 촛불문화제를 가졌다. 21일에도 촛불집회나 거리행진 등 추모행사를 열 계획이다. 트위터를 통해 행사를 제안했다는 양지원(31·여)씨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사회가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남, 그리고 공포

여성들은 왜 거리로 나오는 것일까. 무엇에 공감하고 분노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에서 ‘강남’과 ‘우발적 범죄’라는 특징에 주목한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공간, 수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세련된 공간이 살인의 장소가 됐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는 짧은 순간에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범행이 벌어졌다. 피의자는 충동적이고 우발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두 가지가 평소 여성들이 느끼는 ‘일상의 두려움’을 ‘눈앞의 공포’로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유사한 사건이 농촌지역이나 지방 소도시에서 발생했다면 이런 추모 현상이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젊은 여성들이 많이 다니는 강남은 그 자체만으로 어떤 상징이 될 수 있다.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두려움이 저변에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 교수는 “파리의 ‘나는 샤를리다’처럼 두려움과 동시에 ‘우리는 의연하게 잘 대처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다 ‘우연의 무자비함’은 정서적 공감을 외부로 분출시키는 계기가 됐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묻지마 범죄가 갖고 있는 우연적인 특성, 이 우연의 무자비함이 여성들을 거리로 나서게 만든 게 아닐까”라며 “당시 CCTV 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고,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남자친구가 피해자를 발견하는 모습 등이 우연의 무자비함을 극대화했다”고 해석했다.

심희정 허경구 임주언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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