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양복을 입은 백발의 사장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양옆과 뒤에는 직원 수십명이 역시 양손을 모은 채 섰다. 이윽고 모두 카메라를 향해 허리를 숙인다. 그 위로 비추는 자막. “25년간 유지해 왔지만 60→70.” 한 해 5억개가 팔리는 국민 막대형 아이스크림 ‘가리가리군’의 가격을 60엔에서 70엔으로 10엔(약 100원) 올리면서 빙과업체 아카기유업이 만든 대국민 사과 광고다.
유튜브에 게시된 이 영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별난 광고로 화제가 됐다. 하지만 이 광고는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일본에서 오랜 디플레이션 탓에 가격 인상을 보기 어려웠다는 ‘거시경제의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 광고를 소개하며 “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한 뒤 줄곧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했음에도 디플레이션 문제가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기업의 생산여건이 악화돼 가리가리군처럼 싸고 대중적인 제품의 가격은 오른 반면 디플레이션으로 임금이 오르지 않아 소비자의 구매력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가리가리군의 가격 인상은 아이스크림에 삽입되는 나무 손잡이 원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당초 손잡이를 만드는 목재를 중국에서 수입했으나 중국이 벌목 기준을 강화하면서 원활한 공급을 위해 수입처를 중국보다 목재가가 더 비싼 러시아로 바꿔야 했다. 아카기유업 마케팅 담당자 후미오 하기와라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가리가리군은 아이들 용돈으로도 쉽게 살 수 있는 식품이었다”며 사과 광고를 내보낸 이유를 밝혔다. 이어 “요즘엔 어른들조차 주머니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전했다.
아베 정권은 취임 초기 디플레이션을 일본 경제가 풀어야 할 1순위 과제로 보고 ‘아베노믹스’를 펼쳤다. 금리를 마이너스로 내리는 등 시장에 최대한 돈을 푸는 게 골자였다. 개발도상국이 아니면 보기 힘든 정책이었다. 그러나 소비자물가지수는 아베 정권이 집권한 직후 2년간 급상승한 뒤 다시 폭락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도매물가지수는 오히려 4.2% 떨어져 6년 사이 최대 하락치를 기록했다.
최근 엔화 강세도 악재다. 이로 인해 수입 단가가 내려가 일본 내 가격 상승을 막고, 디플레이션을 심화시켰다. 다음달 총선을 앞두고 실시된 최근 설문에 따르면 유권자 중 절반이 아베노믹스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아베 총리는 내년 4월로 예정된 소비세 인상 연기를 검토하면서 추가 예산 투입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2014년 첫 번째 소비세 인상이 경기침체를 이끈 주범으로 지적되는 등 집중포화를 맞았던 탓이다.
추가 예산 투입에 대한 기대 덕분인지 최근 드러난 지표는 나쁘지 않다. 일본 정부의 18일 발표에 따르면 연율 기준으로 환산한 일본 국내총생산(GDP) 잠정치는 1.7% 증가했다. 개인소비도 전 분기보다 0.5% 증가해 예상치를 웃돌았다. 신케 요시키 다이치생명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경제가 예상보다 강한 회복세를 보였다”면서도 “구마모토현 지진 등의 여파로 2분기에는 다시 추락할 위험이 있다”고 전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월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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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풀었더니 아이스크림값만 올라… 아베노믹스 그늘
입력 2016-05-20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