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강남역 살인’에 표출된 분노, 양성 평등 계기 삼아야

입력 2016-05-19 17:52
17일 새벽 1시 서울 강남역 부근 화장실에서 23세 여성 A씨가 34세 남성 김모씨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김씨는 화장실에 1시간 동안 숨어 있다 A씨가 나타나자 흉기를 휘둘렀다. 이는 ‘묻지마 살인’으로 보도됐다. 18일 오전 8시쯤 ‘강남역 살인사건 공론화’란 타이틀의 트위터 계정이 만들어졌다. 첫 글은 “강남에서 여성 혐오 살인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묻히지 않게 관심을 보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규탄하는 포스트잇과 피해자를 추모하는 국화로 뒤덮였다.

이들이 ‘여성 혐오 살인’이라고 규정한 건 김씨의 진술을 근거로 한다. 그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결심했고, 화장실에서 기다리다 “마침 (여자인) A씨가 나타나서” 살해했다고 말했다. 이는 여성들에게 이렇게 받아들여졌다. ‘A씨는 여자라서 죽었다. 아무 여자나 기다리다 죽인 거니까. 나도 아무 여자 중 한 명인데…다음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아간 발길에는 분노와 함께 이런 공포가 담겨 있었다.

김씨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올 초까지 4차례 총 19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최근 두 달은 치료약을 먹지 않은 터였다. 경찰은 “정신분열증이 상당히 심각한 상태여서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여성 혐오 범죄로 단정할 순 없다”고 밝혔다. 김씨가 정말 여성을 혐오했는지, 정신분열증 때문에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본질은 한국 여성들이 이 사건을 정신분열증 환자의 돌출적 일회성 범죄로 보아 넘기지 못하고 “내 일일 수도 있어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데 있다. 이는 ‘여자여서 안전하지 못한’ 구석, ‘여자여서 당하는’ 피해가 우리 사회에 그만큼 많다는 걸 말해준다.

경찰 통계에서 살인, 강도 등 전통적 강력범죄는 꾸준히 줄고 있다. 하지만 여성이 피해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성폭력 가정폭력 데이트폭력은 거꾸로 크게 늘었다. 1995년 살인·강도·방화·강간의 4대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의 비율은 29.9%였다. 이 수치는 2011년 71.2%로 급격히 상승한 뒤 2013년 90%를 넘어섰다. 인터넷에선 강남역 살인 사건을 놓고 “여자가 그 시간에 왜 밖에 있었느냐”고 말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 사건을 접한 부모들은 딸에게 “밤늦게 다니지 말라”고 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피해자인 여성의 문제를 거론하고, “피해자가 되지 말라”고 당부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이들이 촛불집회와 추모집회를 추진하고 있다. 거리로 나서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는 새겨들어야 한다. 여성이 안전하지 못한 세상, 여성이어서 차별받는 세상에 대한 주문이 담겨 있을 것이다. 구성원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양성 평등 사회는 실현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