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겨울,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한 골동품 가게에 진열된 분청사기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 멈춰 한참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릇의 발(바닥) 부분이 위를 향하도록 뒤집어져 있었다. 발의 모습은 마치 오래 신어서 바닥이 닳은 짚신 같았다.
“이 도자기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 앞 다방에서 차(茶) 한잔 하고 있을 거요.”
골동품 가게 주인의 말을 듣고 곧장 다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도암 지순탁(1912∼1993) 선생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도자기를 배우고 싶다”고 졸랐다. 당시엔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도공이 하대 받던 시절이었다. 다들 먹고살기 바빠 허리띠를 졸라매던 1960년대 초엔 도자기를 사겠다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를 도자의 길로 강하게 이끄셨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뒤집힌 분청사기 그릇이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이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넷이었다.
도암 선생을 따라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산골로 들어갔다. 홍천엔 불을 피울 때 땔감으로 쓸 나무를 구하기 쉽다. 옛날 왕실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했다는 양구의 도석과 백토를 가져다 쓰기도 좋았다. 당시 우리나라엔 도자기 계승이 끊어진 상태였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할 당시 문화말살 정책을 펴 도공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도공들은 기록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자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게 재현작업이었다. 옛날 도자기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만드는 작업이다. 사찰에서 재로 옷감에 물을 들이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재로 유약 만드는 실험을 수없이 했다.
그땐 다들 가난했다. 당장 먹을 게 없었고 미래도 불투명했지만 흙을 만지고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게 좋아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 포수’라는 사냥꾼이 가끔 꿩이나 토끼를 잡아 공방에 던져주고 갔다. 꿩과 토끼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생할 때 하나님이 주셨던 만나와 메추리였다.
그렇게 2년을 버텼다. 1964년에 나는 도암 선생과 함께 경기도 이천 신둔면으로 자리를 옮겨 고려도요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구웠다. 이때는 꽤 많은 사람들이 도자기 굽는 법을 알려달라며 찾아왔다. 나는 가마의 책임자였다. 많을 땐 100명이 넘는 사람을 데리고 도자기를 구웠다. 남들이 10시간을 일하면 나는 15시간 일했다.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던 장기영(1916∼1977) 전 한국일보 사장이 가끔 이곳에 들러 도자기 몇 점을 고르고 금일봉을 주며 격려하곤 했다. 아내도 이때 만났다. 당시 다니던 교회 권사님이 소개를 시켜줬다. 아내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도자기가 안 팔려 생계가 어려웠을 때나 투병생활을 하며 생사(生死)의 기로에 있을 때 아내의 기도가 큰 힘이 됐다. 이 지면을 빌어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정리=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역경의 열매] 박부원 <3> 아무도 도자기 사지 않던 시절, 도자기에 홀려
입력 2016-05-19 2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