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한 장르로 팩션(faction)이 있다. 역사적 사실(fact)과 작가적 상상력(fiction)이 어우러진 작품을 말한다. 연설문, 신문, 사진, 영상 등을 스토리라인 없이 나열하는 기록극(Dokumentartheater)이 문학의 사회적 기능 간과와 지나친 심미성 추구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다면, 팩션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미적 신세계를 펼쳐내는 장르에 해당한다.
이정명 작가의 ‘별을 스치는 바람’은 윤동주 시인의 후쿠오카 형무소 수감생활과 옥사에 관해 팩션 기법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정명 작가는 국내외에서 작품의 예술성과 대중성으로 인정받는 ‘한류작가’이다.
이 작품은 형무소 안 인물들,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자행된 수감자 생체실험을 주요 소재로 삼은 미스터리 소설이다. 일제 강점기 윤동주 시인의 형무소 수감 사실과 그의 시와 삶이 작품에서 무리 없이 상호텍스트성을 이루고 있다.
이 소설은 인물의 성격 구성에서 조선인은 선인, 일본인은 악인 식의 맹목적 민족주의를 거부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초점은 이제 갓 스무 살인 일본인 간수병 와타나베 유이치이다. 그에게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량 살상의 광기에 휩싸인 살인마에 불과하다. 히틀러 나치정권이 자기들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책을 소각했듯이, 조선어말살정책에 따라 형무소 안에서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단테의 ‘신곡’, 백석의 ‘사슴’ 그리고 수감자 윤동주의 ‘서시’는 화염 속 붉은 피를 흘리며 사라져 간다.
소설은 형무소 간수병 스기야마의 의문사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조선인 수감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인물이자 조선어로 쓰인 문서를 집요하게 찾아내 모조리 소각하는 괴수이다. 그런 그의 시신에서 뜻밖에도 조선어 시와 메모가 발견되고 소설은 유이치의 초점에 따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형무소 군상들 사이의 악하거나 순결한 음모를 드러낸다.
스기야마는 죽기 전, 윤동주와 그의 시 그리고 문학서적을 만나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윤동주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마 5:16). 마침내 스기야마의 몽둥이질은 더 이상 분노와 진압의 매질이 아니다. 조선인 수감자의 피를 터뜨림으로써 이들에게 주입된 용액의 신체작용 수치측정을 방해하고 조선인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으로 바뀐다.
“내 이름은 윤동주요.” “네 이름일지 모르지만 조선어야. 조선어가 금지된 걸 모르나?” “윤동주라는 이름이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오. 히라누마 도주라는 이름은 일본인이 억지로 뒤집어씌운 가면일 뿐이오.”…스기야마는 땀에 젖은 모자를 허벅지에 털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 난 변하지 않았어. 나는 여전히 스기야마 도잔이야.” “아니요. 당신은 변했소.”
스기야마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명히 인식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다시는 변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별과 같은 존재를 대하는 순간이, 사실 대하는 이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일이 된다. 이 글의 필자는 하늘에 온통 부끄럼 투성이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소망한다. 우리 역사와 우리 민족의 자랑, 세상이 당해낼 수 없는 기독교인(히 11:38) 윤동주 시인이 문학으로 영화로 강연에서 불쑥 불쑥 나타나길, 그래서 진짜 예수쟁이 기독교인의 심령과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우리 민족이 부끄러움을 잊지 않도록 후손 곁에서 언제나 들려주고 일깨워주길 바란다. 임춘택(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임춘택의 문학과 영성] 별을 스치는 바람,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다
입력 2016-05-20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