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핵심’ 박승춘 보훈처장, 유족 반발에 입장도 못해

입력 2016-05-19 04:02
박승춘 국가보훈처장(가운데)이 18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려다 희생자 유가족의 거센 항의를 받자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다. 광주=윤성호 기자

‘제3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됐다. 정부 기관인 국가보훈처가 주관한 기념식의 모토는 ‘5·18 정신으로 국민화합 꽃피우자’였지만 정부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불허하면서 행사는 갈등으로 얼룩졌다.

◇박근혜정부 ‘성토장’ 방불케 한 기념식=화창한 날씨 속에 열린 기념식에는 정부 주요 인사와 5·18 희생자 유족, 정치권 관계자 등 3000여명이 모였다. 정부 대표로는 황교안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3년째 참석하지 않고 조화만 보냈고,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이 얼굴을 비쳤다.

정치권에서는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국민의당 안철수·천정배 공동대표, 정의당 심상정 상임대표 등 여야 대표급 인사들이 모두 참석했다. 야권 대권 후보인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와 손학규 전 상임고문, 안희정 충남도지사도 참석했다.

황 총리는 기념사에서 “민주화를 위해 하나가 되었던 5·18 정신을 대화합의 에너지로 승화시키자”고 밝혔다. 이어 “각계각층이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소통과 공유, 화해와 협력을 통해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가 끝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이 아닌 합창하도록 결정하면서 기념식은 ‘갈등과 대립’의 장이 됐다. 대부분 참석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불렀지만 황 총리, 현 수석 등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박승춘 보훈처장은 유족들의 반발로 보훈처 주관 행사인 기념식에 아예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민주묘지를 나서며 “대단히 유감스럽다”며 “기념식은 5·18 당사자분들의 기념식이 아니고 정부 기념식이다. (제창 여부를 결정하려면) 국민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했다.

 야권 인사들은 정부 태도를 강력 비판했다. 더민주 김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정부가) 행진곡을 합창만 허용했는데, 너무 옹졸하게 생각한 것”이라며 “아집에 사로잡힌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문 전 대표도 “합창은 되고 제창은 안 되고, 도대체 무슨 논리인지 알 수 없다”며 “이번 행사가 아주 성의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국민의당 안 대표는 “행진곡은 사회 통합을 위해 제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진곡 합창 때 보수단체가 퇴장한 것을 두고는 “국민 통합에 저해되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보훈처장의 작태에 모든 국민이 분노하고 있으며, 무책임한 정부에 대해 한없이 분노한다”고 말했다. 정의당 심 대표와 노회찬 원내대표는 ‘행진곡을 기념곡으로 지정하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기념식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행진곡을 따라 부른 새누리당 정 원내대표는 기념식이 끝난 후 “5·18민주화운동이 화해와 용서, 국민통합의 정신으로 승화되길 빌고 간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기념식에서 행진곡 문제를 놓고 유가족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야권, 행진곡 제창 입법화 추진=야권은 행진곡 제창이 무산되자 내년 행사에서는 제창이 반드시 이뤄질 수 있도록 법제화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19대 국회에서 행진곡을 기념식 지정곡으로 정해 제창토록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정부가 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처장에 대한 해임촉구 결의안도 20대 국회에서 제출하기로 합의했다.

더민주 우상호 원내대표는 “내년 기념식에서는 행진곡이 반드시 제창될 수 있도록 모든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했으며, 국민의당 박 원내대표는 “어떤 경우에도 행진곡 제창을 위해 법제화를 약속대로 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서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개정해야 한다. 5·18 기념식 개최 시 행진곡을 지정곡으로 채택해 식순에 반영토록 하는 것이다. 20대 국회가 ‘여소야대’인 만큼 야권은 수적 우위를 통해 법 개정을 이뤄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야권이 행진곡 법제화를 밀어붙일 경우 보수단체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또 다른 국론 분열 우려도 제기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광주=문동성 기자 the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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