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甲질도 乙질도 아닌… 丙질에 우는 물량팀

입력 2016-05-19 04:02

“한동안 ‘개미지옥’에서 허덕였던 것 같아요.”

김모(29)씨는 18일 전북 군산의 조선소에서 보낸 시간을 힘겹게 더듬었다. 그는 지난 1월 26일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사내하청업체 소속 ‘물량팀’에 입사했다. 두 달 남짓 금속 패널을 용접하는 일을 하다 지난달 9일 퇴사했다. 팀장의 손찌검이 화근이었는데, 악몽 같은 기억은 그것 말고도 줄을 이었다.

물량팀은 사내하청업체가 간헐적으로 고용하는 외주 인력을 일컫는다. 널리 쓰이지 않지만 조선소 주변에선 흔한 용어다. 하청업체는 원청업체에 납품할 일감(물량)을 기한 내 처리하기 버거울 때 물량팀의 손을 빌린다. 물량팀장은 하청업체와 팀원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한다. 하청업체와 계약한 일감을 팀원에게 배분하고 일당을 지급한다. 팀원도 직접 모집한다. 10∼50명이 팀장의 이름을 앞세워 ‘○○○물량팀’으로 활동한다.

하청에 재하청을 받는 형태다 보니 원청업체가 ‘갑(甲)’, 하청업체가 ‘을(乙)’이라면 물량팀장은 ‘병(丙)’쯤 된다. 물량팀원은 ‘정(丁)’이다.

불황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큰 타격을 준다. 물량팀은 경기가 바닥을 치면 일감을 찾기 힘들다. ‘해고 1순위’ ‘구조조정 대상’이 되면서 짐을 싸느라 서럽다.

‘을(乙)’도, ‘병(丙)’도 아니라서

김씨는 지난 1월 ‘이○○ 물량팀’에 첫발을 들여놨다. 대학 졸업장은 마뜩한 일자리를 구해주지 않았다. “시급 6000원에 월급 120만원을 보장한다.” 물량팀장 이모(39)씨의 제안은 그리 솔깃하지 않았다. 최저임금 6030원에 30원이 모자랐다. 하지만 받아들였다. 기술을 익히면 일당으로 15만원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던 터였다. 어떻게든 버텨서 기술을 익히겠다고 다짐했다.

물량팀에 소속되면서 ‘주거의 자유’를 먼저 박탈당했다. 숙소를 제공한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단체 생활을 강요했다. 김씨는 이씨에게 숙박비 17만원을 매월 냈다. 세금과 숙박비 등을 빼고 나면 계좌에 100만원 정도가 찍혔다. 다른 숙소를 구하려고 하자 이씨는 “한 번이라도 지각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윽박질렀다. 이씨는 같은 건물에 살면서 김씨를 운전기사처럼 부렸고, 김씨 차량을 제멋대로 가져다 쓰기도 했다. 기름값은 준 적이 없었다.

두 달 넘게 일하고서야 ‘진짜 월급’을 알게 됐다. 하청업체에서 김씨의 계좌로 월급 190만원을 직접 입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씨가 얼마쯤 챙기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절반 가까이를 챙길 줄은 몰랐다. 김씨는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월급명세서도 받지 못했다. 세금이라며 월급 일부를 떼어갔지만 실제로 납부됐는지도 알 길이 없다.

이씨는 지난달 9일 회식 자리에서 김씨의 뺨을 때렸다. “어린놈이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봤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이씨는 약식재판에 넘겨져 지난달 28일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벌금 30만원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물량팀을 나온 뒤 일용직 잡부로 아파트 공사장을 전전하고 있다.

불황의 그늘

기술이 있다고 ‘정’의 위치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23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 용접공 배모(44)씨는 한 달째 일손을 놓고 있다. 물량팀장인 이씨가 일감을 주지 않아서다. 배씨는 눈 밖에 난 것 같은데 이유도 짐작하기 힘들다고 했다. 일감을 나눠주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다.

그렇다고 이직이 손쉬운 것도 아니다. 출입증과 동의서가 발을 묶는다. 사내하청업체에서 조선소 출입증을 파기하지 않거나, 이직동의서를 작성해주지 않으면 다른 사내하청업체 소속 물량팀으로 옮길 수 없는 구조다. 하청업체 입장에선 일손을 대는 물량팀장과 척을 질 필요가 없다. 배씨는 “호황일 때는 일감이 많아서 한 치 앞이 불안한 물량팀 신세여도 살 만했는데, 불황이 닥쳐오니 감쳐졌던 부조리만 드러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손이 부족할 때는 어느 정도 대우를 해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기대하기 힘들다.

경남도와 금속노조에 따르면 경남 거제에만 물량팀이 2만명이고 전국적으로 3만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고 단기간 일하다보니 정확한 집계조차 힘들다. 금속노조가 지난해 물량팀 489명을 조사한 결과 38.0%가 임금체불을 경험했고, 61.9%만 4대 보험에 가입했다.

신훈 이가현 기자 zorb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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