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갈등조정력 상실한 정치, 그 민낯 드러낸 5·18 기념식

입력 2016-05-18 18:05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제3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소란과 파행으로 얼룩졌다. 기념식이 열리기 전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여부를 놓고 격렬하게 맞섰던 보혁 충돌이 기념식에서도 그대로 재연됐다.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었음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끝내 이를 막지 못했다. 어제 기념식은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컨트롤타워가 부재한, 감추고 싶은 한국 정치의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2013년 취임 첫해에 참석한 이후 이듬해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불참이다. 대통령이 꼭 참석해야 하는 행사도 아니고, 이보다 중요한 일정이 있다면 양해되는 사안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참석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사건이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가 나온데 대해 위로와 함께 숭고한 뜻을 기렸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통과 화합은 이런 게 아니겠는가.

황교안 국무총리는 기념사에서 “각계각층이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소통과 공유, 화해와 협력을 통해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며 “민주화를 위해 하나가 되었던 5·18 정신을 대화합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더욱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이루어 나가자”고 말했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당위다. 하지만 황 총리가 소통과 공유, 화해와 협력, 하나를 강조하는 순간에도 참석자들은 불통하고, 갈등하고 둘로 갈렸다. 야당 정치인은 물론 정의화 국회의장과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불렀으나 황 총리와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은 끝끝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보수단체 회원들은 노래가 시작되자 행사장을 떠났다. 애초부터 이럴 작정이었다면 보수단체들은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게 바람직했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물리력을 행사한 일부 유족들의 행위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 유족들의 애끊는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바람과 다른 결정을 한 박 처장을 내쳐도 된다는 정당한 이유나 명분이 될 수는 없다. 노래가 싫다고 집단 퇴장한 보수단체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정의·민주를 위해 투쟁한 5·18 정신에도 어긋난다.

내년 기념식에서도 올해 같은 불상사를 볼 것 같아 답답하다. 박 처장은 행사 참석이 무산된 후 기자들에게 “(합창) 결정권이 보훈처에 있다고 얘기하기도 어렵고 청와대에 있다고 얘기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합창하되 부르고 싶은 사람은 따라 부르게 하거나 제창하되 부르기 싫으면 안 불러도 되는, 내용상 똑같은 이 문제 하나를 우리 정치가 풀지 못하고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역지사지할 때 논란이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