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의 화장실 휴지 때문에 사장이 경찰에 체포됐다.’ 베네수엘라 언론인이 최근 미국 잡지에 기고한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실상을 알리려 그가 택한 소재는 ‘화장지’였다. 체포된 사장은 베네수엘라 서부에서 20년째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난해 노조와 맺은 단체협약이 발단이었다.
노조는 “화장실에 늘 휴지가 있도록 사측이 비치한다”는 조항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지난해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은 180%였다. 생필품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호텔마다 관광객에게 화장지를 가져오라고 안내해야 했다. 이웃 나라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화장지 줄 테니 석유와 바꾸자”는 제안까지 받았다.
사장은 화장지를 구하러 뛰어다녔다.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지면 단협 위반이 된다. 이는 파업의 빌미가 될 수 있고, 경제 위기에 파업이 발생하면 회사는 치명타를 입는다. 직원 수백명분 화장지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게 구해와도 금세 없어졌다. 직원들 집에도 화장지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암시장에 눈을 돌렸다. 비싼 값에 몇 개월 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공장에 ‘물건’이 도착한 며칠 뒤 경찰이 들이닥쳤다. 쌓여 있던 화장지를 압수하며 사재기 혐의로 사장을 체포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생필품 부족이 미국과 자본가의 정권교체용 ‘경제전쟁’ 탓이라 규정했다. 그에 맞서 진행 중인 사재기 수사에 걸려든 거였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2위 석유 매장량을 갖고 있다. 2000년 이후 고유가 시기에 석유 수출로 1조 달러 이상 벌어들이고도 저유가 2년 만에 경제가 무너졌다. 예상됐던 유가 폭락에 아무 대비책이 없었다. 현재 식량과 생필품 부족률은 50∼70%로 추정된다.
이쯤 되면 좌파 우파를 떠나 정부가 무능한 것이다. 체포된 사장은 풀려났다. 경찰이 요구해 수만 달러를 줬다고 한다. 베네수엘라 화장지는 무능한 정부를 감시하지 못한 국민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보여주고 있다.
태원준 논설위원
[한마당-태원준] 베네수엘라의 화장지
입력 2016-05-18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