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머리서 발끝까지… ‘화학제품 포비아’ 24시

입력 2016-05-18 04:02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의 실체가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화학제품 포비아(공포증)’가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발암물질이 든 제품들이 버젓이 판매됐다는 환경부 조사 결과에 공포는 경악으로 변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화학물질에 노출되고 있을까. 평범한 20대 회사원 김지우(가명·26·여)씨의 하루는 화학제품으로 시작해 화학제품으로 끝났다.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화학물질 범벅’= 17일 오전 6시에 눈을 뜬 김씨의 하루는 디퓨저 덕분에 라벤더향으로 시작됐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 보디워시로 샤워를 한 뒤 스킨, 에센스, 선크림, 향수 등 10여 가지 화장품을 꼼꼼히 발랐다. 렌즈세정액에 담가둔 소프트렌즈를 꺼내 눈에 넣고, 재킷 위로 섬유탈취제를 6, 7번 뿌려 간밤의 ‘회식 흔적’을 지우니 출근 준비가 끝났다. 오전 8시, 사무실에 도착한 김씨는 컴퓨터를 켠 뒤 손세정제로 손을 닦고 일을 시작했다. 출장 다녀온 내역을 정리하면서 영수증을 붙이다 손에 묻은 딱풀은 물티슈로 닦았다.

점심 식사를 마친 김씨는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화장을 고쳤다. 거울을 보니 오는 주말에 염색과 눈썹 문신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화장실 벽면에 달린 방향제가 ‘칙’ 하고 향기를 내뿜었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 화장을 지우고 집밥을 먹었다. 밑반찬으로 비빔밥을 만들고 조리김 한 팩을 뜯으니 훌륭한 저녁이 됐다. 맨손으로 세제를 이용해 설거지를 마치고 보니 모기가 보였다. 훈증기형 모기향을 찾아 창가에 놓았다. 빨래를 돌리는 동안엔 주말에 빨아뒀던 블라우스를 다렸다. 다림질 보조제를 사용하니 손쉬웠다. 김씨는 집안일을 마친 뒤 향초에 불을 붙이고 저녁시간을 즐겼다. 애지중지 키우는 화초 잎사귀를 식물광택제로 닦아준 뒤 잠자리에 들었다.

이날 김씨가 직접 만지거나 사용한 화학제품은 어림잡아도 30가지다. 샴푸, 물티슈, 합성세제 등 세정제류와 각종 화장품, 향초 등 방향제, 탈취제, 접착제 등이다. 여기다 조리김 속 제습제, 목제가구에 사용된 방부제 등 간접적으로 접하는 화학제품까지 포함하면 40가지는 거뜬하게 넘는다.

문신은 환경부, 화장품은 식약처…섞어 써도 되나요= 김씨가 사용한 화학제품들은 비슷한 기능을 해도 관리 방식이나 관리 부처가 다르다. 렌즈세정액, 모기약 등 의약외품은 식품의약품안전처 소관이다. 의약품에 준해 가장 엄격하게 관리한다. 샴푸, 향수 등 인체에 직접 닿는 화장품이나 주방세제 등도 식약처 담당이다. 사용할 수 없는 원료, 사용제한이 필요한 원료에 대한 기준을 정해 고시한다. 각 제품을 허가하고, 제조업체도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등 규제가 촘촘하다.

방부제나 방향제, 소독제, 합성세제, 방충제 등 기타 생활화학제품 15종은 환경부 지정 위해우려 제품이다. 품목마다 유해물질의 기준치, 사용제한물질, 표시 의무 등이 정해져 있다. 다만 식약처보다 금지물질이 적고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운영된다. 화장품에 못 쓰는 포름알데히드, 메탄올, 벤젠 등을 방향제에는 제한적으로 쓸 수 있다.

나머지 화학제품은 공산품일 경우 산업통상자원부, 농약류는 농림수산식품부 등 관계 부처가 안전을 확인한다. 환경부 관계자는 “현재 정부의 관리를 받는 모든 물질은 용법만 지켜 사용하면 안전하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빈틈’이다. 문신용 염료, 김서림방지제 등 일반생활화학제품 4종과 살생물제품인 소독제, 방충제, 방부제는 산업부 소관의 공산품이었지만 안전 기준이 아예 없다가 지난해 6월 말부터 환경부 관리를 받게 됐다. 가습기 살균제도 2011년 의약외품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규제 대상이 아니었다.

다림질 보조제, 토너 카트리지, 잎 광택제 등은 지금도 규제 울타리 밖에 있다. 유사 제품을 관리하는 산업부나 농림부에 기준이 없는 데다 환경부 유해우려물질로도 지정돼 있지 않아서다.

기준이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있다. 인체에 직접 닿는 제품인데도 속눈썹·쌍꺼풀 접착제는 환경부 관리 물질이라 화장품에 금지된 클로로포름, 부톡시에탄올 등을 쓸 수 있다. 눈썹·아이라인·입술 문신제에도 화장품에 못 쓰는 수은, 비소 등을 넣을 수 있다.

여기에다 전문가들은 개별 제품에 소량 들어간 화학물질이 체내에서 혼합될 경우 나타나는 ‘칵테일 효과’를 우려한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정부가 직업, 성, 연령, 생활패턴과 제품별 사용 규모를 고려해 안전한 가이드라인을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제조자도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수민 홍석호 기자 suminis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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