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부원 <2> 빠듯한 살림에도 십일조… 신앙 모범 된 어머니

입력 2016-05-18 17:45 수정 2016-05-19 10:42
박부원 장로(앞줄 왼쪽)가 중학생이던 1950년대 초에 전북 김제 입석리 마을 동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는 모습. 박 장로는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이때부터 신문배달 등을 하며 고학(苦學)을 했다.

나는 1938년 전북 김제 죽산면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제는 쌀이 많이 나는 곡창지대다. 김제평야에 흉년이 들면 나라가 굶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유학자였다.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마당에 널어놓은 보리가 쫄딱 젖어도 나가보지 않았을 정도로 선비정신이 강하셨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기계를 만지다 1945년 광복 후 한국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땅을 팔아 장사를 시작했다. 일을 벌일 때마다 잘 안됐다.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300여년 동안 대대로 지켜오던 집을 떠나 김제군 봉남면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여기서 방앗간을 시작했다. 노름에 손을 대는 바람에 방앗간마저 날리고 다시 마을 어귀에 큰 돌이 있다는 김제군 입석(立石)리로 집을 옮겼다. 피난민들이 몰려 살던 동네다. 장남인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학교를 자주 빠졌다. 낮엔 일을 하고 밤엔 헌책방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하루가 지나면 대여료를 더 내야 해서 책 한 권을 빌리면 하룻밤을 넘기지 않으려고 밤마다 눈을 비볐다.

어머니는 신앙이 깊은 크리스천이었다. 유학자 집안으로 시집 왔지만 교회를 거르는 일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며느리를 막지 않았다. 보리가 비에 젖든 말든 개의치 않았던 것처럼 며느리의 신앙생활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갔다. 교회는 집과 거의 붙어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어머니는 없는 형편에도 밥을 지으면 항상 성미를 떠서 교회에 가져갔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 3:9)는 성경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야속하게 느껴졌다. 가족 먹을 밥도 넉넉하지 않은데 왜 얼마 없는 쌀을 교회에 가져가시는 걸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쌀 한 톨 아쉬운 시절에 목사님을 위해 성미를 뜨는 어머니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십일조로 헌금할 돈은 다리미로 정성껏 펴서 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나의 신앙생활에도 선한 영향력을 미쳤다. 도자기가 팔리지 않아 생계가 어려웠을 때도 십일조를 거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 신문배달을 했다. 신문을 다 돌리고 나면 신문 몇 부가 남았는데 그걸 호떡집에 가져다주고 호떡과 바꿔 먹었다. 하루는 혼자 호떡을 다 먹고 집에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큰아들 준다고 된장찌개와 흰 쌀밥을 차려놓고 계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난 아직도 그때 어머니에게 호떡을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딱히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경기도 파주 쪽에 돌산이 있었는데 거기서 돌을 깨며 돈을 벌었다. 공사판에서 등짐도 졌다. 어린 나이에 힘이 달려 일을 제대로 못하니 하루 종일 일해 봤자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밥값도 채 안됐다. 김제, 유학자의 집, 고학(苦學), 신문배달, 막노동…. 도자기와는 동떨어진 삶이었다. 내 도예의 길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목에서 우연히 시작됐다. 정리=이용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