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현지시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리글리필드에서 열린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시카고 컵스의 경기. 강정호(28)는 9회초 팀이 1-0으로 앞선 상황에서 이날 네 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강정호는 이미 7회초 세 번째 타석에서 상대 선발투수 존 레스터를 상대로 적시타로 때려내 피츠버그의 선취점을 이끌었다. 컵스 마운드는 마무리 투수 헥터 론돈이 지키는 중이었다. 론돈은 강정호에게 처음부터 직구를 주지 않기로 작정한 듯 했다. 1구는 슬라이더였고, 6개 연속 슬라이더만 던졌다.
3볼 2스트라이크 풀카운트. 더 이상 론돈에게는 던질 공이 남아 있지 않았다. 평균 구속 157㎞의 무시무시한 강속구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며 평균자책점 0.65, 피안타율 0.195를 기록한 리그 최고의 마무리투수가 강정호 앞에서 쩔쩔 매고 있었다. 가운데 한복판에서 몸 쪽으로 조금 높게 들어온 강속구를 강정호는 놓치지 않았다. 딱 하나 던진 96마일 패스트볼은 그대로 리글리필드 왼쪽 외야석을 직격했다.
‘파이어볼러의 종결자.’ 강정호에게 붙은 별명이다. 파이어볼러란 시속 155∼160㎞의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들도 강정호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처럼 기가 죽는다. 어떻게 하면 패스트볼을 던지지 않을 수 있을까만 생각할 정도다.
이날 컵스와의 경기에서도 그는 6번 타자 겸 3루수로 선발 출전해 4타수 2안타(1홈런) 2타점으로 원맨쇼를 펼치며 피츠버그의 2대 1 승리를 이끌었다. 9회 때려낸 홈런과 마찬가지로 7회 2루타 때도 강정호의 배팅 패턴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스터와 론돈의 패스트볼이 오기까지 기다렸다 휘둘렀다. 힘과 정확성을 모두 갖춘 강정호의 타구는 모두 장타로 연결됐다. 2경기 연속 무안타에 그쳤고 전날 경기에서 빈볼 논란에 휩싸였지만 상대 파이어볼러들의 투구에 힘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레스터는 경기 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강정호는 패스트볼에 강한 타자다. 제구가 잘 되지 않았던 경기였다”며 고개를 숙였다. 피츠버그의 클린트 허들 감독은 “강정호는 특별한 선수다. 우리 팀의 플레이에 모든 가치를 더해줬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정호는 데뷔 첫 해였던 지난 시즌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강속구에 빠르게 적응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마무리 투수 트레버 로젠탈을 상대로 데뷔 첫 홈런을 때리는가 하면 ‘광속구 투수’로 불리는 아롤디스 채프먼(뉴욕 양키스)의 161㎞ 공을 받아쳐 안타를 만드는 등 파이어볼러들에게 강한 면모를 보였다. 지난 시즌 시속 95마일을 넘는 강속구가 들어왔을 때 타율은 0.422였다.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2위 기록이다.
부상 재활 과정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파워를 보강한 강정호는 올해 본격적으로 빅리그 파이어볼러들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올 시즌 출전한 8경기에서 타율 0.292(24타수 7안타). 7개의 안타 중 4개가 홈런이었고 2개는 2루타였다. 연타석 홈런으로 화려한 복귀전을 치렀던 지난 7일 세인트루이스와의 경기에서도 모두 패스트볼을 노렸다. 시즌 첫 홈런은 타일러 라이온스의 시속 90마일(145km) 투심을 공략했다. 2호 홈런은 케빈 시그리스트의 94마일(151㎞) 포심을 받아쳤다. 4개의 홈런 중에서 시즌 3호 홈런만 유일하게 122㎞짜리 커브를 공략한 것이었다. 나머지 2개의 2루타 역시 93마일(150㎞) 안팎의 빠른 공을 때려 장타로 만들었다. 힘에서 리그 정상급 투수들의 강속구를 이겨내고 더 많은 장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강정호는 올 시즌 OPS(출루율+장타율) 1.232를 기록 중인데 이중 장타율만 0.875에 달한다.
강정호는 “론돈이 6개 연속 슬라이더를 던지는 동안 직구를 기다렸다”며 “한가운데로 몰리는 실투를 놓치지 않고 때린 게 홈런이 됐다”고 시즌 4번째 홈런을 때린 소감을 전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빠른 볼 적응에 파워까지 겸비하면서 진정한 파이어볼러의 종결자로 거듭난 강정호는 지난해보다 더 뛰어난 장타력으로 팀과 야구팬들에게 웃음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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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볼러’의 킬러 강정호
입력 2016-05-17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