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3일 영국 런던 화이트하트레인. 잉글랜드 토트넘 홋스퍼가 그리스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에 5-0으로 앞선 후반 42분 주심이 레드카드를 꺼냈다. 토트넘 골키퍼 휴고 로리에 대한 퇴장 명령이었다. 사실상 대체가 어려운 골키퍼의 퇴장. 아무리 이기고 있었지만 토트넘의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선수가 골키퍼를 자처했다. 불과 6분 전 토트넘의 5번째 골을 넣고 해트트릭을 달성한 최전방 공격수. 3년의 임대 생활을 마치고 이제 막 토트넘 1군으로 합류한 ‘루키’ 해리 케인(23·사진)이었다. 케인은 그라운드에 그대로 서서 골키퍼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골문 앞으로 달려갔다.
트리폴리스는 골문 앞에 엉성하게 선 케인을 비웃기라도 하듯 페널티박스 앞 프리킥에서 직접 슛으로 가볍게 만회골을 넣었다. 케인의 축구인생에서 유일무이한 1실점. 케인은 이것이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기록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공격수로서 제몫을 다하고 굳이 골키퍼를 자처한 이유는 오직 팀을 위해서였다.
전방의 압박과 후방의 점유율을 강조하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의 전술을 완성하기 위해 상대 수비수를 밀착 방어하는 공격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지만 경기를 마칠 때마다 활약이 좋았던 동료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80만 팔로어에게 소개하는 스타플레이어. 케인은 그런 선수다.
케인은 포체티노 감독의 4-2-3-1 포메이션에서 부동의 원톱 스트라이커다. 하지만 3년 전까지만 해도 하부 리그를 전전한 임대 선수였다. 토트넘은 2009년 입단한 케인을 레이튼 오리엔트(2011년), 밀월(2012년)과 같은 3부 리그 팀으로 돌렸다. 2013년엔 프리미어리그의 노리치시티, 당시 2부 리그 팀이었던 레스터시티를 오가면서 두 차례나 짐을 꾸렸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 토트넘의 최전방을 꿈꾸면서 임대 생활을 경험으로 삼았다. 케인은 3년의 임대 생활을 “지금의 나를 만든 시기”라고 말한다. 한참을 돌아 다시 입은 토트넘의 유니폼. 케인은 포체티노 감독이 부임한 2014년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난 시즌 34경기에서 21골을 넣고 득점 2위에 올랐다. 토트넘이 첼시, 맨체스터시티(맨시티), 아스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빅4’의 대항마로 떠오른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16일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38라운드 원정경기(1대 5 패)로 폐막한 2015-2016 프리미어리그에서 케인은 생애 처음으로 득점왕을 확정했다. 전 경기 출전에 25골. 레스터시티의 우승을 일군 제이미 바디, 지난 시즌 득점왕 세르히오 아구에로(맨시티·이상 24골)를 1골 차로 따돌렸다.
하지만 케인은 웃지 않았다. 자신의 타이틀보다 선두권에서 3위로 밀린 팀의 성적을 걱정했다. 38라운드를 마치고 어두운 표정으로 구단 방송사 스퍼스TV 카메라 앞에 선 케인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팬들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짧게 말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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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5-16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