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골퍼 왕정훈(21·사진)은 ‘이방인’이다. 한국과 필리핀 어느 곳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유목민처럼 떠돌이 생활을 했던 왕정훈이 설움을 떨치고 풍운아가 됐다. 한국 선수 중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유러피언 투어 2주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아버지 왕영조(58)씨는 어릴 때부터 재능이 있는 아들에게 골프를 시켰다. 그런데 국내 환경은 이상했다. ‘골프 대디’들이 극성이었다. 특히 과정과 매너를 생략한 채 이기는 것만 추구하는 세계였다. 결국 아버지 왕씨는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 필리핀으로 이주했다.
골프를 열심히 연습했지만 2년 후 돌아온 한국은 왕정훈을 받아주지 않았다. 2년간 국내에서 학업을 중단했기에 유급이 돼 1학년으로 학교를 다녔다. 3학년 선수로 뛸 수가 없었다. 1학년으로 대회에 출전하면 “왜 나이가 많은 아이가 나오느냐”는 탄원이 들어왔다.
결국 왕정훈은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갔다. 완전히 한국 제도권 밖으로 나간 것이다. 그래도 왕정훈은 타고난 실력으로 16세 때인 2011년 필리핀 아마추어 챔피언십을 우승하는 등 현지 성인 아마추어 대회를 제패했다. 그러자 필리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샘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어린 왕정훈이 우승하면 월급을 주는 필리핀 국가대표에게 돈을 줄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왕정훈은 필리핀에서도 사실상 쫓겨났다. 그리고 떠돌이가 됐다. 다행이 중국프로골프(CPGA) 투어는 나이 제한이 없었다. 그렇게 16세이던 2012년 프로로 전향했다. 왕정훈은 C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을 역대 최연소로 통과했고, 그 해 상금왕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아시안투어 퀄리파잉스쿨도 무난히 뚫었다. 2014년 상금 21위, 지난해에는 상금 랭킹 9위까지 이름을 올렸다. 결국 왕정훈은 올해 1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유라시아컵에서 아시아 대표 선수로 선발됐다. 그리고 자신을 외면했던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풀시드도 따냈다.
왕정훈은 올 들어 유러피언 투어를 눈여겨봤다. 2주전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열린 유러피언 투어 핫산 2세 트로피 대회에 참가했다. 사실 왕정훈의 모로코행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는 시드를 확보하지 못했다. 대기 순번 3번이었다. 최소 세 명이 출전을 포기해야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떠돌이 생활을 했던 왕정훈의 배짱이 빛났다. “대회에 출전 못하더라도 연습하는 셈 치고 가자”고 생각하며 무려 20시간이 더 걸리는 모로코행 티켓을 끊었다. 다행이 대회 포기 선수가 나와 이 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왕정훈은 스페인의 나초 엘비라와 두 차례 연장 승부를 벌인 끝에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15일(한국시간) 모리셔스에서 열린 아프라시아 뱅크 모리셔스 오픈에서도 시디커 라만(방글라데시)에 대역전극을 벌이며 우승을 차지했다. 두 경기 모두 잡초 같은 삶을 산 왕정훈의 뚝심이 빛났다.
이로써 왕정훈은 유러피언 투어 사상 최연소 2개 대회 연속 우승(20세 263일)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유러피언 투어 2주 연속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왕정훈은 세계랭킹 순위가 16일 70위까지 올라왔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남자 골프 출전권은 두 장이다. 안병훈(25)은 이미 25위로 안정적 출전을 확보한 상태다. 남은 한 자리를 김경태(30·45위) 이수민(23·69위)과 다투게 된 것이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유러피언 투어 사상 최연소 2연속 우승… ‘이방인’ 왕정훈, 뚝심의 왕
입력 2016-05-16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