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배병우]이름 갖고 국정 농락하기

입력 2016-05-16 19:33 수정 2016-05-16 20:25

총선을 앞두고 강봉균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이 용어를 처음 썼을 때 필자는 알아보지도 않고 ‘적절한’ 정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형 양적완화’를 두고 하는 얘기다. 내용을 확인도 않고 이렇게 믿었던 데는 강 전 장관에 대한 신뢰가 있다.

2001년 처음 경제부처를 출입할 때 그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었다. 당시 그의 주도로 KDI는 10년 앞을 내다본 국가전략·경제 청사진인 ‘비전 2011’을 내놓았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이래 세계를 풍미한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톡톡히 받은 보고서였다.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는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사실상 파산했다. 어떻든 당시 10년 앞 국가대계라는 생각거리를 우리 사회에 던진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석에서 만난 강 전 장관의 열정에도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형 양적완화는 본래의 양적완화(QE)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QE는 중앙은행의 전통적 통화정책 수단인 금리조정이 먹혀들지 않을 때 전 경제 부문에 무차별로 돈을 푸는 것이다.

한데 한국형 양적완화는 위기에 처한 조선·해운산업에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 구제금융을 주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 경제학자는 한국형 양적완화라는 조어에 대해 ‘정치적 선동(propaganda)’ 수준이라고 했다.

심각한 것은 이런 얼토당토않은 용어를 대통령이 두 차례나 공식석상에서 사용하고 시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청와대 경제보좌관들은 뭘 했느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강 전 장관, 그리고 이 아이디어를 처음 냈다는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이 작명의 터무니없음을 몰랐을 리 없다. 이들이 의도를 갖고 오(誤)작명을 했다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데, 그 의도는 뻔하다. 조선·해운산업 구조조정 자금을 재정에서 투입하면 번거로운 국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분명히 책임론도 불거질 것이다.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면 이를 회피할 수 있다. 그래서 본질과 동떨어진 양적완화라는 용어를 갖다 붙였을 것이다.

베테랑 경제관료들의 법과 원칙을 무시하는 편의주의적 발상에 아연할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대기업이나 산업에서 추가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대비나 하고 있는지다. 2014년 현재 전체 대기업의 28.1%가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한계기업이다.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이면 한 해 벌어들인 수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비율은 대폭 늘어날 게 분명하다. 앞으로 2차, 3차 구조조정 때도 이처럼 땜질식, 책임회피성으로 일관할 것인지 묻고 싶다.

야당도 본질은 차치하고 이름 선점 효과만 노린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경제민주화’가 대표적 예이다. 김 대표는 자신이 주창하는 경제민주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김 대표는 “경제민주화는 재벌개혁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아니다”라며 스무고개식 답변만 거듭하고 있다. 시장의 공정한 경쟁 룰을 지키는 게 핵심이라는 말도 추상적이기 그지없다. 김 대표와 여러 차례 만난 학계 원로는 “∼은 아니다, ○○은 아니다라고 할 뿐 무엇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lies in the detail)’는 서양 속담이 있다. 일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아주 작고 구체적인 부분이다.

배병우 국제부 선임기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