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주판과 북한산

입력 2016-05-15 19:31

라일락꽃들이 절정으로 피었다가 한 송이씩 시들어 등굣길에 좁쌀처럼 떨어지던 아침. 나는 그 지독한 라일락 향기를 맡으며 뛰어야만 했다. 두꺼운 재킷은 벗었지만, 미역 줄거리 같은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 위에 교복 조끼를 받쳐 입고 뛰노라면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무거운 내 발걸음과는 다르게 뛸 때마다 책가방 속에 든 주판은 훌라춤 추는 아가씨 옆에서 타악기를 흔드는 연주자처럼 경쾌한 리듬을 들려주었다.

나는 자주 지각했다. 학교는 시의 경계에 있었고, 우리 집은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30분을 더 가야 했다. 우리 학교 등교시간은 주변의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30분 일렀는데, 나는 늘 아슬아슬하게 5분 아니면 10분 지각이었다. 일찍 학교에 가는 날은 자기 자리에 앉아 ‘명상의 시간’이 될 때까지 주판으로 165를 놓으며 운지연습을 했다. 지각한 날은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서 있어야 했는데, 첫 지각 때는 수치심도 들었지만 자주 지각하다 보니 오히려 복도에 서 있는 편이 좋았다. 비가 오고 난 후, 왕릉이 있는 숲에서 막 피어나는 아까시 향기를 실은 바람이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 주었다. 친구들의 주판알 돌리는 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복도 창밖으로 유난히 가까워진 북한산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한참 복도에 서 있던 나에게 다가오시던 선생님. “아유, 이 녀석아. 너를 어쩌면 좋으니…” 하시며 선생님도 잠시 북한산을 말없이 바라보셨다. 그러곤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시고는 조용히 들어가라고.

깜깜하고 낯선 바다, 혹은 모래바람 부는 사막에 불시착한 것 같은 나에게 “사실 너만 그런 것 아니야. 가끔은 선생님인 나도 그래”라고 말없이 이야기하셨다. 인생의 커다란 지침이 되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님’은 내가 들기엔 너무 무거운 단어다. 하지만 라일락과 아까시 향기가 겹치는 계절만 되면 생각나는 ‘선생님’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이 차가운 세상에 영원히 식지 않을, 따뜻하게 데운 돌멩이 하나 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기분이다.

유형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