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야후의 증권 사이트에는 15일 이런 광고가 올라왔다. “도이치뱅크를 상대로 한 집단소송에 참여하실 분은 로즌 로펌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거나 저희 사무실의 필립 킴을 찾아주십시오.” “브론스타인, 게위츠 & 그로스먼 법률사무소는 2013년 5월 15일부터 2016년 4월 29일까지 도이치뱅크의 주식을 보유했던 분들을 대신해 집단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독일 최대 민영 은행이자 독일 경제의 핵심인 도이치뱅크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한 변호사들이 함께 소송에 참여할 주주들을 찾고 있다.
전 세계에서 소송에 휩싸인 도이치뱅크
모건스탠리는 “도이치뱅크가 내년까지 39억 파운드(약 6조6000억원)의 소송을 당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그 뒤에도 소송이 마무리되지 않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 2월 도이치뱅크가 신종자본증권(코코본드)의 이자를 제대로 갚지 못할 것이란 전망 때문에 주가가 급락, 전 세계 증시를 공포에 떨게 했던 사건도 막대한 소송비용 때문이었다. 독일에서는 도이치뱅크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시나리오까지 거론되고 있다.
미국만이 아니다. 전 세계 70개국에서 2790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도이치뱅크는 곳곳에서 대규모 소송을 당하고 있다. 소송 내용을 살펴보면 주가조작, 허위보고, 부실 숨기기와 이를 위한 선물 상품 거래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여기에는 한국의 사례도 있다. 2010년 도이치뱅크의 자회사인 도이치증권이 도이치뱅크 홍콩지점과 함께 코스피지수를 급락시켜 10분 만에 선물시장에서 448억원을 거둬들인 사건이다.
위기의 시작
도이치뱅크의 위기는 2002년 스위스 은행가 요제프 아커만 취임 이후 시작됐다. 전통적인 독일 기업은 집단경영체제로 운영된다. 주주 대표와 종업원 대표, 사외이사 등이 함께 참여하는 감독위원회와 경영위원회가 주요 의사결정을 한다. 그러나 아커만은 “3년 내에 주가를 25% 끌어올리겠다”며 일종의 비공식 고문단인 집행위원회를 만들어 자신의 1인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그가 회장으로 있던 2012년까지 한국의 옵션쇼크 사건을 포함해 영국 은행간 금리(리보) 조작 사건, 이탈리아 국채 금리 조작 사건, 이란 금융제재 위반 사건 등이 벌어졌다. 러시아에서 100억 달러 규모의 수상한 돈 거래에 대한 조사를 받고 있고, 미국에선 금융위기 이전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에서 벌인 거래가 수상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독일 내에서는 탄소 배출권 거래와 관련된 탈세 혐의까지 제기됐다. 독일 디차이트지는 “이 시기 도이치뱅크는 사회적 기여에는 무관심하고 수익만 좇는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수익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지난해 도이치뱅크 회장에 취임한 존 크라이언은 도이치뱅크에 쌓인 부실을 찾아냈다. 그 결과 무려 67억 유로(약 8조88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적자 규모보다 더 컸다. 한때 100달러가 넘었던 도이치뱅크 주가는 16달러로 추락했다.
독이 든 성배
이런 대규모 부정과 부실은 도이치뱅크가 독일 기업들의 해외 진출에 깊이 관여한 결과라고 독일 언론들은 지적했다. 도이치뱅크 본사가 있는 곳에서 발행되는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차이퉁은 “독일 기업들은 아시아와 남미 등에 사업을 적극 확장하면서 미국의 투자은행에 의존하기보다 같은 편이 될 수 있는 독일 은행을 선호했다”며 “독일 경제는 강하고 큰 독일 은행을 원했고 그 선택은 도이치뱅크뿐이었다”고 보도했다.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촉발됐던 2008년 4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아커만 당시 도이치뱅크 회장을 자신의 집무실에서 열린 생일잔치에 초대했다. 도이치뱅크는 유럽까지 번져온 금융위기에도 끄떡없다는 사인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메르켈과 아커만이 부딪친 그 축배는 독이 든 성배였다.
위기를 숨긴 대가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은행에 대한 규제는 강화됐고, 정치권은 더 혹독한 윤리적 기준을 요구했다. 미국과 스위스, 영국의 은행들은 청문회에 불려가고 합종연횡을 하며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 과정에서 비즈니스 모델을 가다듬고 핀테크 분야에 진출하며 변신해갔다.
그러나 변화를 외면한 도이치뱅크는 탈법과 범죄에 엮였다. 지난 1일 블룸버그는 영국의 금융감독위원회(FCA)가 도이치뱅크가 국제적인 자금세탁에 연루된 사실을 적발,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부정거래를 막기 위해 강화된 감독 규정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수익을 위해 과거에 벌인 각종 거래가 이제는 부도덕한 범죄로 추궁당하고 있다.
금융산업의 도덕적 실패가 위기를 불러온 사례는 도이치뱅크만이 아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이 가진 부실 자산은 금융위기 이후 오히려 배로 더 늘었다. 부실기업에 자금을 퍼붓다 위기에 처한 한국의 금융산업도 마찬가지다. 감춰진 부실이 드러나며 관련 기업의 주가가 폭락하고 국민의 돈으로 손실을 메울 궁리가 한창이다. 한국에선 집단소송이 없는 탓에 변호사 광고를 찾을 수 없을 뿐이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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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5-16 2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