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모 카드회사 광고 카피가 유행한 때가 있었다. 이 카피는 무한 경쟁에 내몰려 법에 보장된 연차휴가조차 다 쓰지 못하는 처지의 현대인에게 한 번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자극제가 됐다. 몇 년이 흘렀건만 열심히 일해도 떠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서글픈 현실은 여전하다.
유대인은 땅에게도 휴식을 줬다. 안식년이다. 매 7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그 땅에서 저절로 자란 곡식은 거두지 않았다. 느헤미야, 레위기, 신명기 등 구약성경 여러 곳에 이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땅도 휴식을 취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서구에서는 일찍이 이 전통을 이어받아 안식년 제도를 도입한 곳이 적잖다. 우리나라에선 대학과 극소수 기업이 실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재충전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올해 교사 안식년 제도를 도입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하버드대에 합격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큰딸 말리아가 입학을 내년 가을로 1년 미뤘다. 대학생활에 앞서 1년간 갭이어(gap year)를 갖겠다는 이유에서다. 갭이어는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봉사, 여행, 인턴, 창업 등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흥미와 적성을 찾는 기간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학생판 안식년이다. 정말이지 중·고교 6년간 오로지 대학입시에만 매달린 수험생에게 ‘강추’하고 싶다. 미국의 경우 연간 3만∼4만명이 갭이어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한다.
1960년대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갭이어는 윌리엄, 해리 두 왕세손이 2000년대 초 각각 칠레와 호주에서 갭이어를 보내면서 전 세계로 확산됐다. ‘봄봄봄’의 로이킴도 갭이어를 활용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 꿈에 그리던 가수가 됐다. 갭이어는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드는 게 문제다. 미국엔 금수저가 아니면 엄두내기 힘든 4만 달러짜리 갭이어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학업을 잠시 중단하는 대학생들이 많다. 하지만 재충천이나 적성, 진로를 찾기 위한 게 아니다. 취직이 안 돼 어쩔 수 없이 휴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식년과 갭이어, 아직 우리에겐 그림의 떡인 모양이다.
이흥우 논설위원
[한마당-이흥우] 안식년과 갭이어
입력 2016-05-13 1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