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발족한 규제개혁위원회(규개위)는 권한이 막강하다. 대통령 직속기구로 정부의 모든 규제 정책을 심의·조정한다. 규제 신설·강화와 관련된 법령은 사전에 심판대에 올려 심사한다. 심의 결과 철회나 삭제로 의견이 모이면 ‘개선 권고’를 주문한다. 일반적으로 ‘권고’는 구속력이 없는 의견일 뿐이다. 한데 규개위의 권고는 강제력이 있다.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에 따라야 한다고 행정규제기본법에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부 부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규개위가 그 위에 군림한다.
어떨 때는 국회를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국회의 관련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규개위가 지난해 ‘빈병 보증금 인상’ 시기 등을 1년 늦춰 이미 소주값을 올린 주류업계를 웃게 만든 것은 블랙코미디다. 정치권이 월권행위라고 반발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입법권을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반면 책임에선 자유롭다. 무분별한 규제 완화나 규제 도입 지연 등으로 ‘바다의 세월호’나 ‘안방의 세월호’ 같은 사태가 발생해도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 책임은 오로지 각 부처의 몫이다. 이러니 안건을 놓고 굳이 밤을 새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인적 구성의 대표성도 다양성도 부족하다. 총 24명 위원으로 구성된 규개위는 당연직 정부위원 7명(공동위원장 국무총리 포함) 외에 민간위원장을 비롯한 민간위원 17명이 포진해 있다. 민간위원은 모두 대통령이 위촉하는데 현재 무려 11명이 교수다. 특정 직역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구조다. 특정 경제지(紙) 소속원이 위원 자리를 계속 맡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민간위원장을 맡은 이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상임고문이다. 김앤장은 주요 고객이 기업이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있는 가습기 살균제 업체 옥시레킷벤키저와 담배 소송의 필립모리스코리아도 고객이다. 이들 민간위원 면면을 볼 때 시민 편에 서기보다 기업 이해를 대변할 소지가 크다. 특히 ‘옥시 사건’에선 학자의 양심을 판 교수와 기업의 검은 커넥션까지 드러났다. 이처럼 기업과 민간위원들 사이에도 음습한 연결고리가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 의심스러운 고리의 하나가 담배업계다. 최근 ‘흡연 경고그림 담뱃갑 상단 배치’에 제동을 건 규개위의 배후일 것이라고 대부분 짐작한다. 지난주 규개위 회의록이 공개됐을 때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6쪽짜리 회의록은 담배업계 논리를 대변한 위원들의 발언으로 도배돼 있었다. 술의 사회적 비용도 적지 않은데 왜 담배만 강력히 규제하느냐, 세계보건기구(WHO) 담배규제기본협약을 굳이 따를 필요가 있느냐 하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왔다. 그 후폭풍은 거셌다. 규개위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됐다. 시민단체들의 비난 성명이 잇달았다. 1인 시위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매일 이어지고 있다.
입법 취지는 물론 국제 표준이나 세계적 경향을 무시하고 일반 상식도 통하지 않는 규개위라면 더 이상 존속할 가치가 없다. 불필요한 규제는 혁파하고, 꼭 필요한 규제는 도입하고 강화하는 게 규개위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기업 로비 창구로 전락해 공공성을 무시한다면 오히려 우리 사회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
보건복지부의 불복으로 경고그림 배치 안건 재심이 13일 이뤄지는데 규개위는 이제라도 ‘민심’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 또다시 국민 건강권을 유린한다면 여소야대의 20대 국회가 나설 수밖에 없다. 규개위의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축소하고 대표성, 공정성, 투명성, 책임성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의 대수술을 받아야 할 게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
[여의춘추-박정태] 규제개혁위를 손 볼 때가 됐다
입력 2016-05-12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