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하나님과 이슬람교 알라에 대한 문제적 논쟁작을 출간해 국내외에서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던 미국 예일대 신학부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가 ‘기억’을 주제로 독자들 앞에 돌아왔다. 이번엔 학대를 경험한 피해자 입장에서다. 그는 칼 마르크스에 관한 논문을 썼다는 이유로 스파이 혐의를 받고 군 생활 내내 심문을 받았다. ‘G대위’에게 받았던 정신적 상처는 깊었다. 제대 이후에도 악몽은 지속돼 “G대위가 내 마음의 집으로 이사와 거실 한복판에 자리 잡고 살아갔다”고까지 기록했다.
이 책은 그의 자전적 고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겪은 아픈 기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기독교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특히 가해자와 그의 악행을 제대로 기억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식에 집중한다. 여기엔 ‘평화와 포용의 신학자’로 알려진 그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볼프는 ‘나쁜 기억 없애기’를 다루지 않는다. 그 이상이다. 그의 표현대로 말하면 ‘가해자를 미워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사랑하기 원하는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아픈 기억을 치료하고 결속시키며 공동의 번영을 촉진하도록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가해자에게까지 자비와 친절을 베풀겠다는 맹세가 기억을 이끄는 지침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를 구속(救贖)해야 하며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 입은 기억은 또 다른 악행인 복수를 유발시키든지 아니면 ‘그냥 잊자’는 식의 체념으로 이어질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올바로 기억하는 방식엔 세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 진실하고 정의롭게 기억하라. 둘째 치유를 위해 기억하라. 셋째 과거의 일이 정의로운 투쟁과 화해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억하라.
올바른 기억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한 악행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조종하지 못하게 하며, 자아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을 제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저 상처 입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사랑하고 화해를 추구하기로 다짐하는 사람이 되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다. ‘구속된’ 기억이 주는 혁명적 변화인 셈이다.
그렇다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화해를 이룰 수 있는 본질은 무엇인가. 본질은 기억을 더 큰 도덕적 틀 안에 넣을 때 발견할 수 있다. 볼프는 그 틀을 성경의 전통에서 끌어내 출애굽 사건과 그리스도의 죽음 및 부활에서 찾는다.
볼프는 “출애굽의 기억은 하나님이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을 갖게 했고, 그리스도 수난의 기억은 마음을 움직여 증오의 대상이 돼야 마땅할 이들을 사랑하려 노력하게 해줬다”고 고백했다.
출애굽의 기억이 구약시대 하나님 백성의 핵심 정체성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억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그리스도는 고통 받는 자들과 연대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범죄자들을 대신해서도 죽으셨다. 그분은 악행을 저지른 자들과 고통을 초래한 자들을 위해, 즉 압제받는 자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원수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피해자들만이 아니라 가해자들까지도 아우른다. 그리스도 사랑의 대상은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 원수들이다. 이 프레임이야말로 피해자인 우리가 가해자들과 화해하며 용서를 선포할 근거가 된다. 볼프가 말하는 ‘기억의 종말’은 곧 십자가를 통한 화해와 용서다.
책의 곳곳에는 저자 자신이 20여년 전 겪은 고통스런 기억이 반영돼 있다. 그는 이를 마중물 삼아 성경과 교회사, 고전과 대중문학, 심리학과 철학을 넘나들며 ‘성경적’ 기억의 중요성을 풀어냈다. 책을 읽으며 세월호 사건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겠다. 폭력과 고통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볼프의 탐구는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악행은 기억돼야만 화해로 나갈 수 있다
입력 2016-05-12 20:06 수정 2016-05-17 19:29